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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깅스이 May 23. 2021

우울을 씻고 말리는 방법

물로 충분히 헹궈주시고, 햇볕에서 말려주세요.

 우울하면 웅크린다. 이불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다. 심지어 화장실 가는 것조차 내키지 않는다. 힘이 없다. 의지도 없다. 한창 우울이 심할 때 잠을 아주 많이 잤다. 백수가 되면 밤낮이 바뀐다던데, 나는 그저 많이 잤다. 하루 12시간은 기본이고 15시간씩 잔 날도 많았다. 아무래도 잠을 자면서 현실을 회피하고 싶었던 것 같다. 자도 자도 피곤했다. 자도 자도 잠이 왔다. 


 자다 깨서 시계를 보면 대충 오후 2시. 어떤 날은 4~5시에 깨기도 했다. 그러면 이제 드는 생각이 있다. 오늘 하루는 망했다. 늦게 일어나서 기분이 처지다 못해 후지다. 이미 이렇게 된 거 계속 누워 있는다. 어차피 일어나도 하고 싶은 게 없으니. 이불을 둘둘 말아 감고는 옆으로 누운 채로 스마트폰을 쥔다. 나 빼고 잘 먹고 잘 사는 듯한 남들의 인스타그램 피드만 무심하게 바라본다. 엄지손가락을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그렇게 또 하염없이 누워만 있다 보면 가슴이 답답하다. 괜히 불안하다. 일어나긴 싫은데 이러고 있으면 안 될 것 같고, 참 염병이다.


 우울은 수용성이니 물에 씻긴다고, 그러니 어쨌든 샤워하라는 말을 본 적이 있다. 어디서 봤냐면 이불을 둘둘 말아 감고는 옆으로 누운 채로 쥐고 있던 스마트폰에서- 과학적으로 입증된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씻고 나면 한결 나아지는 건 확실했다. 적어도 이불속에서 떡진 머리를 베개에 비비며 이리 누웠다, 저리 누웠다 할 때보다는 낫다. 우울하면 모든 게 어렵다. 당연한 일상을 영위하려면 용기, 의지, 노력씩이나 필요하다. 샤워도 마찬가지다. 욕실에 가는 게 어렵고, 머리에 물 묻히기가 그렇게 어렵다. 아니, 내가 지금 어디 갈 것도 아닌데 꼭 씻어야 하나? 하면서 머뭇거린 날도 많다. 그래도 막상 씻으면 개운하다. 좋아하는 노래를 크게 틀고 씻어보자. 좋아하는 노래가 없다면 유튜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플레이리스트'라고 검색하면 온갖 바이브를 뽐내는 노래가 술술 재생된다. 감사한 유튜바 여러분들!


 열심히 씻고 나와 기초를 챱챱챱 바른다. 머리를 말리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는다. 어떤 날은 기분이 좋아졌다가도 다시 우울하다. 씻었지만 딱히 약속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다시 침대로 기어가 이불을 둘둘 만 날도 많다. 그래도 다시 생각해보자. 

 '내가 나갈 일이 없지, 갈 데가 없냐?'


 뚜렷한 목적이 없으면 밖에 잘 나가지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나갈 일이 있으면 최적의 동선을 짜서 후다닥 해결하고 돌아오는 스타일이다. 효율 최고! 이건 아마 성격이겠다. 하지만 약속이 없다고 아무 데도 못 갈 건 아니었다. 목적지가 없어도 외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줄곧 잊곤 했다. 과거의 나에게 말하고 싶다. 그럴 땐 그냥 나가라고. 나가는 것 자체에 목적을 두라고. 


동네를 돌다 보면 귀여운 미끄럼틀도 만날 수 있다. (canon af35ml - kodak gold200)


 인생의 목표가 대입이었던 고등학생 때가 기억난다. 친구들과 종종 점심시간마다 '광합성하러 나가자'고 했었다. 비록 우리는 식물이 아니었지만, 한낮의 운동장에서 과자를 집어 먹으며 햇살을 쬐었다. 그걸로 에너지를 얻었으니 얼추 광합성이라 하겠다. 실제로 햇볕을 쬐면 비타민D가 합성되고, 세로토닌의 분비가 활성화되면서 우울감 해소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산책로를 걸어도 좋고, 동네 한 바퀴 걸어도 좋다. 요즘 나는 해가 잘 드는 창가 자리에서 커피 한 잔 마시고 글 쓰는 게 낙이다. 


 꼬질꼬질 꿉꿉한 우리의 우울. 매일매일 물로 잘 씻고 햇볕에 잘 말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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