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직이라 쓰니 작가 지망생이라 읽더라
곧 거북이가 될 듯한 일자목, 안쪽으로 말린 어깨, 어김없이 틀어진 골반의 소유자. 체형 교정에 좋다는 필라테스에 관심이 생겼다. 1회 체험권을 끊고 방문한 작은 스튜디오에는 크고 작은 초록 식물과 필라테스 기구들이 어우러져 있었다. 큰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그곳의 바이브를 완성해주었다. 생각보다 삭막하지 않은 공간에 긴장이 풀렸다.
필라테스 강사와 작은 테이블을 두고 마주 앉았다. 탁자 위에는 간단한 신상과 방문 계기와 운동 목적을 묻는 설문지가 있었다. 이름과 생년월일을 쓰고 전화번호를 적었다. 그다음 빈칸은 '직업'란이었다. 직업이 왜 궁금하지? 하는 일에 따른 고질병을 짚어내려는 걸까? 찰나의 머뭇거림을 눈치챘는지, 강사는 내게 무슨 일을 하냐고 물었다.
"저 지금 일 안 해요. 퇴사하고 다른 거 준비해요."
현재 무직, 그러니까 백수라는 말을 에둘러 표현했다. 여지를 준 대답이었나? 뭘 준비하냐는 꼬리 질문이 붙었다.
"아, 글 쓰는 일 하려고요..."
내뱉은 말을 애매하게 끝맺으며 서류의 직업란에는 우직한 글씨로 '무직'이라고 적었다. 강사는 나를 바라보며 작가 지망생이시구나- 하더니, 내가 쓴 글자를 보고는 독특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이러면 보통 작가 지망생이라고 적는데, 무직이라고 적으시네요."
대충 웃으며 넘겼지만 괜히 찜찜했다. 무직이 뭐가 어때서!
직업 [職業]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따라 일정한 기간 동안 계속하여 종사하는 일
표준국어대사전
'작가 지망생'을 나의 직업이라 할 수 있을까? 직업 사전적 의미를 참고해서 생각해봤다. 글쓰기는 적성에 맞는다. 능력은 점점 더 키워가고 있다. 글쓰기는 계속할 예정이지만, '지망생'을 계속하진 않을 테다. 무엇보다 지금 글로 돈 벌어 생계를 유지하진 않는다. 따라서 직업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하달까. 작가 지망생은 그저 나의 현 상태를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단어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무슨 일 하냐는 질문, 참 듣기 쉬운 장소가 있다. 미용실이다. 하지만 미용실에서 가장 듣기 좋은 말은 '샴푸 먼저 도와드릴게요.' 가죽 의자에 누워 눈을 감는다. 머리에 닿는 감촉에 집중한다. 꾹꾹 눌리는 두피, 향기 가득한 샴푸 거품, 딱 적당한 온도의 물줄기. 이 소중한 순간을 나른하게 즐기고 싶은데 스텝 선생님은 대체로 내게 말을 건다. 오늘 머리하고 어디 가시냐, 무슨 일 하시냐는 질문이 대부분이다. 내 대답은 늘 비슷하다. 머리하고 아무 데도 안 가요. 퇴사하고 쉬고 있어요. 그러면 이제 전 직장에서는 뭘 했는지, 왜 그만두었는지, 앞으로의 계획은 어떤지 살가운 말투로 꼬치꼬치 묻는다. 질문자를 무안하게 하고 싶지 않은 나는 떨결에 미주알고주알 잡다한 역사를 늘어놓을 수밖에.
진짜 궁금해서 묻는 질문일 수도 있다. 어쩌면 여러 미용실의 영업 방침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나누길 좋아하는 사람도 많을 거다. 사적인 질문에 내 얘기를 모조리 해야 할 의무는 없지만 입을 다물고 있기에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다. 직장에 다닐 적에도 직업을 묻는 건 싫었다. 힐링하러 미용실에 왔는데 일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회사원이라고 하면 어떤 분야에서 일하는지 금세 물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무직'인지라 딱히 할 말이 없어 질문이 더 불편한가 싶긴 하다. 작가 지망생이라는 한 단어로 지금의 나를 정의하기에는 어쩐지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 쓰는 일을 하려 한다고 순순히 대답을 주절거리는 나도 어지간히 미련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