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 명작 - 성냥팔이 소녀
라이터를 팔아 겨우 먹고살았다. 소녀는 정말이지 겨우 먹고살았는데. 망할 전자담배가 등장해버렸다. 사람들은 더 이상 라이터를 찾지 않았다. 새로운 밥벌이가 필요했지만 집에 쌓인 재고가 소녀의 발목을 잡았다.
"라이터 사세요."
별 소득은 없었지만 늦은 밤까지 라이터를 팔았다. 집에 돌아온 소녀는 아버지가 깰까 도둑처럼 현관문을 열었다. 낡은 현관문 경첩에서 끼익 소리가 났다. 아, 가엾은 소녀는 어쩌면 정말 도둑일지도 모른다. 술에 절은 남자는 자신의 딸을 도둑년이라고 불렀다.
"라이터 판 돈, 네가 다 떼어먹었지? 기어이 아비를 굶길 셈이냐!"
소녀의 아버지는 소주병을 든 채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여차하면 술병이 날아들 기세다.
'맞으면? 아프거나, 죽겠지 뭐.'
소녀는 알고 있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녀의 가련한 인생은 끝나지 않는 한,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걸.
제 풀에 지친 아버지는 잠이 들었다. 소녀는 시퍼렇게 멍든 손으로 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편의점 김밥으로 오늘의 유일한 끼니를 해결하고 남은 돈, 사천 오백 원을 아버지 머리맡에 두었다. 이 돈은 술병이 되어 돌아올 테지만 말이다. 소녀는 이불을 꺼내어 문짝 하나가 기울어진 싱크대 앞에 기대어 앉았다. 비좁은 집에서 그나마 아버지와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는 곳이다. 소녀는 잠을 청할 생각 없이 뜯어진 이불 끄트머리의 누런 솜을 만지작거렸다. 자고 일어나면 또 오늘 같은 내일이 올 테니까 말이다.
싱크대 맞은편 벽은 소녀의 멍처럼 푸른곰팡이로 가득하다. 그 앞에 쌓인 라이터 상자를 바라보며 한숨 쉬던 소녀는 추위에 몸을 웅크리며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무심코 움켜쥔 라이터를 꺼내 들었다. 연녹색 플라스틱이 촌스럽다.
"드르륵, 칙. 드르륵, 칙."
소녀는 멍하니 라이터를 켰다 껐다.
'역시 이걸로 따뜻해질 수는 없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드르륵, 칙. 불빛 너머에 누군가 아른거린다. 소녀의 아버지가 인자한 얼굴로 앉아있다. 취기 없는 아버지의 모습이 당황스러웠다. 십여 년 전 작은 담배 가게를 폐업한 후, 그는 이미 알코올 중독자가 된 지 오래다.
'술이 깼나?'
소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아버지를 응시했지만 그는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다. 아버지의 온화한 표정에 소녀는 마침내 마음을 놓았다. 그 순간, 라이터에 얹었던 엄지에 힘이 풀렸다. 어둠 속에서 다시 켜진 라이터 불. 밝아진 방 안의 아버지는 소녀를 향해 웃으며 손짓했다. 손짓 아래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이 있었다. 소녀는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상냥했던 예전의 아버지가 돌아온 걸까? 아버지를 향한 시선은 금세 눈물로 가득 찼다. 메말랐던 얼굴에 눈물이 하염없이 떨어졌다.
춥고 어둡다. 인자한 아버지는 없다. 소주병 옆에 쓰러져 자는 아버지만 존재한다. 소녀의 눈시울이 다시 붉어졌다. 지극히 당연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 눈물이 흐를수록 소녀의 좌절은 분노가 되었다.
"이게 아니야. 이게 아니라고!"
소녀는 벌떡 일어나 라이터를 켰다. 다시, 또다시. 아무런 변화가 없자, 소녀는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재고 박스를 찢어발겨 라이터를 바닥에 쏟았다. 손가락이 벌게질 정도로 수많은 라이터를 켜댔지만 모든 게 그대로였다. 화가 난 소녀는 라이터를 던져 버렸다. 그러자 현실이 변했다. 미처 꺼지지 않은 라이터 불이 술병에 붙었다.
"따뜻하다. 따뜻해."
소녀는 흡족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소녀의 축축한 얼굴에 보조개가 깊게 파였다. 그녀의 집이 이렇게 따뜻한 적이 있었던가? 불은 조금씩 번지더니 몇 없는 옷가지를 태우기 시작했다. 소녀는 개의치 않았다. 아무리 껴입어도 따뜻하지 않았던 옷, 그 쓸모없는 것들이 타오르면서 불꽃은 더욱 커졌다.
'꽃처럼 아름다워 불꽃이구나!'
불길은 무섭게 번져갔으나, 소녀의 눈에는 그저 환상적인 꽃길이었다. 더욱 풍성해지는 꽃길에 소녀는 황홀해하며 천천히 뒷걸음질했다.
"악!"
소녀는 오른발을 펄쩍 떼며 비명을 질렀다. 소녀의 발 밑은 라이터로 가득했다. 불길에 열이 오른 라이터는 폭발 직전이었다. 꽃길은 온데간데없다. 소녀의 눈동자는 빨갛게 이글거리는 거대한 화마로 가득 찼다.
웅성대는 사람들과 불 끄는 소방관 사이로 경찰차가 들어섰다. 집 앞 골목에 주저앉아 있던 소녀는 얼빠진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대다가 이내 굳은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물집이 잡힌 오른발을 절뚝거렸다.
'기껏 도망쳐서는, 꼬락서니도 등신 같네.'
이제 소녀는 자신이 저지른 이 비참한 삶의 말로를 고백해야 한다. 그러나 이 비참함에 대해서는 결코 비참한 얼굴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황홀했던 환각, 아니 환상을 돌이키기 위해 소녀는 라이터를 켤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녀의 바람대로 되지 않았을 뿐이다. 아버지를 두고 혼자 뛰쳐나온 자신의 비겁함은 지난날의 학대와 가난을 떠올리며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소녀는 비로소 경찰 앞에 섰다. 억지로 올린 입꼬리가 떨리는데, 초점 잃은 눈은 또 벌겋게 글썽거린다. 해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그랬어요. 제가, 그랬습니다."
죄인이 된 소녀는 평생을 속죄하겠다고 다짐했다. 소녀는 감방이 춥다고 아우성인 사람들 틈에 조용히 누웠다. 보풀이 일어난 하늘색 담요가 더없이 포근하다. 죄를 지었는데 이토록 따뜻하게 지내게 된 것은, 도무지 이해 못 할 아이러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