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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심한 주피 Nov 16. 2020

힘빼기와 힘주기 사이, 그 어딘가에

프로그램에 따라 다르겠지만 

음악 전문 프로그램을 제작할 때는 

하루에 약 20곡, 녹음이 있는 날은 2일치인 40곡을 선곡합니다. 

휴가를 가려고 녹음을 길게 한다고 하면 3일치인 60곡도 선곡을 하구요. 


혼자만의 약속으로 음악원고를 쓰겠다고 결심하면서 

녹음-녹음-생방 있는 날(3일치 방송을 제작하는)에는 

정말 정신없이 일하다 다 마치고 편집기 앞에 앉아서 

한숨 돌리면서 '난 뭐하고 있지?'라는 생각도 들었구요. 


음악이든 오락이든 어떤 장르든 

데일리로 프로그램을 만드는 건 

종종 기계적으로 찍어내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어딘가에 힘을 주고 어딘가에서는 힘을 빼야 심력, 체력이 모두 안배가 될텐데요. 


입사 후 AD 때 선곡 관련으로 제 사수인 PD가 해준 얘기는 

선곡의 흐름이 있다. 

힘을 줄 때 주고, 내려갈 땐 내려가고, 다시 줘야할 포인트에는 주고 

강, 약 조절뿐만 아니라 강과 약 사이 중간도 있다고 말이죠. 


여전히 아직도 뭔소리여 하고 있는데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는 첫곡을 가장 신경 많이 씁니다. 

오프닝이 생명이니까요. 

날씨, 방송시간, 그날의 사건, 원고, 진행자 톤 등을 모두 고려해서요. 


그 다음에 중간 중간 있는 코너 원고에 맞춰 선곡을 하구요. 

그리고 그 빈 틈을 채워 넣습니다. 

앞 분위기와 비슷하게 가야할 때도 있고, 

분위기를 조금 바꿔야할 때도 있구요. 


두 곡을 연이어 틀 때는 어떤 의미로 붙일지, 어떤 분위기로 할 지 등도 고민하구요

진행자가 소개하기 편하게, 

청취자가 들었을 때 의아하지 않게 


뜬금없는 선곡이 가장 무서우면서도 힘을 발휘할 때가 있지만요 


라디오 선곡과 플레이리스트 만들기는 또 다른 거 같습니다. 


아무튼 살면서 힘빼기와 힘주기를 결정하는 게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계속 힘만 주면서 살아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많이 들구요. 


최근 상담선생님과의 대화 중에 '성실성'이란 단어가 확 머리에 박힌 날이 있었습니다. 

상담이란 작업 자체가 힘들다 보니 가기 싫을 때가 많은데요

결국 꾸역꾸역 가서 오기 힘들었지만 왔다고 말씀 드렸는데, 

선생님이 제게 '그게 OOO님의 성실성이죠'라고 가볍게 말하셨습니다. 


약간의 성찰까지는 아니지만 머리를 확 뚫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학창시절부터 회사생활까지 저를 여기까지 오게 한 힘이 

부모님이 주신 생각보다 강했던 체력과 

선생님이 시키든, 부모님이 시키든, 상관이 시키든 

내가 해야할 일로 정해지면 무조건 기간 내에 중급 이상의 퀄리티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실행한, 약간은 '미련한 성실함'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육과 군대 및 여러 사회 생활, 타고난 성격이 합쳐져서 나오지 않았나 싶은데요)


제 성실함은 상담을 꾸준히 가는 데 도움도 됐지만 

업무나 기타 다른 일등에 있어 슬렁하거나 놓아야할 걸 놓지 못하고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양 손으로 꼭 붙잡고 있던 성실함을 이제 슬며시 한 손 놓고  

그 손으로는 힘빼기와 손잡기. 친해지기. 


익숙한 나와의 건강한 이별, 그리고 새로운 나를 만들어가는 길. 


앞으로의 제 과제일텐데요. 


오늘의 선곡은 아릿함 90 + 따뜻함 10 감성의 노래입니다. 


오늘의 노래 주욱 한번에 듣기 (믹스테이프) 


01. 이수현/ 아직 너의 시간에 살아 

02. 오열 / 그때 그 소나기처럼 

03. 제휘 / Dear Moon 

04. 서문탁 / 사랑, 그까짓 게 

05. 정밀아 / 언니 

06. 강아솔 / 그대에게 

07. 한웅재 / 하숙생 

08. 타린 / 들꽃 같은 작은 사랑이었고 어리숙한 사랑이었죠 

09. 나희경 / 끝, 그 이후 (Sorr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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