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성 황제의 남자는?
측천무후(則天武后, 624705)는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성 황제로, 당나라의 황후에서 주나라(武周, 690705)를 세워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인물입니다. 본명은 무조(武曌)이며, 탁월한 정치력과 권모술수로 권력을 장악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측천무후
입궁과 권력 장악 당 태종(唐太宗, 이세민)의 후궁으로 입궁했으나, 태종 사후 불교 사원으로 보내졌습니다. 후에 당 고종(唐高宗, 이치)의 후궁이 되어 다시 궁으로 돌아와 황후가 되었습니다. 고종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섭정을 하며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황제 즉위와 통치 690년, 당나라를 무너뜨리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주(周)’라는 새 왕조를 세웠습니다. 관료제를 개혁하고 과거제를 강화하여 능력 있는 인재를 등용했습니다. 불교를 적극 후원하며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했습니다.
말년과 몰락 측천무후가 노쇠하면서 신하들과 황족들이 반발하기 시작했습니다. 705년, 쿠데타로 인해 퇴위당하고, 당나라가 복원되었습니다. 같은 해 사망했으며, 후에 당나라 황제의 칭호로 추존되었습니다.
측천무후 평가
능력 중심의 정치와 개혁을 단행했지만, 정적을 숙청하며 권력을 유지한 점에서 독재적인 면도 있었습니다.
여성으로서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황제가 된 점에서 강한 의지와 정치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무후가 사망한 후, 그녀의 무덤(乾陵)에는 "무자비(無字碑)"가 세워졌는데, 이는 그녀의 공과를 후대의 평가에 맡기겠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측천무후는 강력한 지도자로서 중국 역사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입니다.
측천무후가 3,000명의 남자와 밤을 보냈다는 이야기
후궁 제도 반전설 전통적으로 황제는 수많은 후궁과 관계를 가지며 혈통을 유지했지만, 측천무후는 반대로 자신만의 남성 후궁을 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녀는 젊고 건강한 남성들을 궁으로 들여 자신의 쾌락을 즐겼으며, 이를 위해 비밀리에 ‘남자 후궁’을 운영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장의지(張易之)와 장창종(張昌宗) 형제 측천무후는 노년에 젊은 장의지·장창종 형제를 총애하며 그들에게 권력을 부여했습니다. 이들이 그녀의 사적인 생활에 깊이 연루되었다는 이야기가 퍼지며, 황후가 많은 남자들과 관계를 맺었다는 소문이 확대되었습니다.
은밀한 야사와 정치적 음해 당대의 사가(史家)들은 측천무후를 정당한 황제로 기록했지만, 후대의 유학자들이 그녀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며 성적 문란함을 강조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3,000명의 남자"라는 숫자 자체가 과장된 표현이며, 권력을 가진 여성에 대한 전형적인 음해 방식 중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측천무후에 대한 실제 역사적 관점
실제 역사에서 측천무후는 뛰어난 정치 감각과 강력한 통치력을 가진 지도자였습니다. 그녀는 과거제를 강화하고, 불교를 보호하며,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등 중요한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즉, 그녀의 성생활에 대한 소문은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당시의 남성 중심 사회가 강한 여성 통치자를 깎아내리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큽니다.
측천무흐의 남자
측천무후는 처음에 당 태종의 후궁으로 입궁하여 "무미(武媚)" 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태종 사후, 불교 사원(감업사)으로 보내졌지만 후에 당 고종의 총애를 받아 궁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당 태종이 죽은 후, 측천무후는 감업사에서 출가한 신분이었으나, 후에 태종의 아들이자 새 황제인 당 고종의 총애를 받으며 황후가 되었습니다.
고종은 건강이 좋지 않았고, 점차 그녀에게 정치적 권한을 넘겼습니다.
결국 그녀는 황후에서 황태후를 거쳐 황제의 자리에 오릅니다.
측천무후가 나이가 들었을 때, 젊고 미남인 장의지와 장창종 형제를 총애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들은 그녀의 측근으로 정치적 영향력도 컸으며, 황제와 가까운 관계였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그러나 측천무후가 몰락하자 이들은 반대파에게 처형되었습니다.
본래 승려였던 설대녕은 측천무후의 총애를 받으며 권력을 얻었고, 그녀의 비밀 연인이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후에 권력을 남용하고 측천무후의 신뢰를 잃어 결국 제거되었습니다.
의사였던 심군방 역시 측천무후의 총애를 받은 남자 중 하나로 전해집니다.
그는 궁에서 그녀의 건강을 돌보면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측천무후가 여러 남성과 관계를 맺었다는 이야기는 후대의 유학자들이 그녀를 비방하기 위해 퍼뜨린 부분이 많습니다.
특히,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 황제가 권력을 가진 것에 대한 반발로 인해 이러한 소문이 강조된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그녀는 매우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인물이었으며,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강력한 인사들을 활용한 것이지, 단순히 남성 편력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즉, 측천무후에게 특별히 가까웠던 남성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많은 남성을 두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후대의 과장된 기록일 가능성이 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