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실패 2016년 1월호
할 일이 있었다. 아니,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쓰자. 그 둘을 잘 분간하지 못하는 우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미루고, 미루고, 미루고, 미뤘다. 문제는 이 일은 몇 주째 릴리쿰에 쌓여있는 재활용 쓰레기나 함께 조립하자는 말만 몇 달째인 탁자와는 다르다는 거였다. 전자요리의 레시피북을 만들겠다는 명목으로 청년허브에서 받은 지원금. 그 돈은 분명 우리의 공금 통장 안에 들어있었지만, 완전히 우리의 돈은 아니었고, 지출 완료일과 그 지출이 헛된 게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날짜가 정해져 있었으며, 그 일을 완수하지 않으면 꽤 많은 사람의 얼굴이 분노나 부끄러움으로 붉어질 것이었다. 당연히, 우리의 얼굴이 붉어진다면 그것은 분노보다는 수치일 것이며, 설령 분노라 해도 그 대상은 우리 자신일 게 뻔했다. 그러니, 만들어야 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은 마감을 며칠 앞둔 늦은 저녁이었다. 세 명은 각자의, 혹은 공유하는 방에 틀어박혔다. 그리고 미친 듯이 - 솔직히 말하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과 다르지 않다 - 작업을 시작했다. 물고기가 원고를 썼고, 디자인은 호랑이, 삽화는 까나리가 맡았다. 물고기가 챕터 하나를 완성할 때마다 구글 문서와 휴대폰으로 대충 찍은 삽화의 콘티가 공유되었다. 그러면 호랑과 까나리가 다음 바통을 이어받았다. 솔직히 김성모 화백의 만화공장이 이보다 빠를까 싶을 정도의 속도였다. 번갯불 콩볶음 요리의 마지막 정점은 인쇄소 사장님이 맡으셨다. 그는 파일을 받은 바로 다음 날 완성된 책을 보내왔다.
멋지게 완성된 100권의 책은 우리에게 ‘우리는 닥치면 한다. 그것도 아주 잘'이라는 근거가 희박한 자신감을 너무 강하게 심어줘 버렸다. 언젠가는 그 자신감이 우리의 발등을 찍을 날이 올 테지만, 뭐 그래도 잘 만든 건 사실이니 어쩌겠나. 즐길 수 밖에.
#마감이있어야일한다 #이렇게재밌을줄알았나 #진작_쓸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