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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liquum Jan 27. 2021

Chapter 4. 오른손의 모험

[어린이작업실 모야의 비밀]은 도서관 속 어린이작업실 '모야 MOYA'를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어떤 팀들이 모여 어떤 고민을 하며 어떻게 만들었는지, 의도와 시도를 담은 과정을 상세히 기록합니다. 어린이작업실이라는 공간이 궁금하신 분, 다양한 형태의 도서관의 변화를 상상하는 분들께 구체적인 영감이 되길 바랍니다.


물고기입니다.


지난 챕터에 이어 모야의 등장인물 소개를 계속해 보겠습니다.


Chapter 1. 모야가 시작된 모양부터 읽으려면 여기를 클릭하세요.

Chapter 3. 등장인물 소개를 처음부터 읽으려면 여기를 클릭하세요.



Chapter 4. 오른손의 모험

이제 모야의 마지막 등장인물, 오른손에 관해 이야기해 봅시다.


#모야에 허락된 유일한 어른, 오른손


모야는 노 어덜트 존 No Adults Zone이지만, 어른 없이 어린이들만 있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어른과 사회 때문에, 그리고 우리 역시 확신할 수 없었던 까닭에, 특정 부류의 어른이 상주하도록 하였습니다. 우리가 정한 그 어른의 명칭은 ‘오른손’입니다.

‘작은손’과 우대(偶對)로 ‘큰손’을 먼저 고려했으나, 이미 다른 뜻으로 통용되고 있어 제외하였습니다.


어린이들의 안전을 살피고, 재료와 도구를 관리하고, 어린이들의 작업 과정을 지켜보는 사람이기 때문에, 어른들은 ‘오른손’을 이 공간의 책임자라 정의할 것입니다. 그게 틀린 것은 아니지만, 작은손에게도 오른손이 공간 책임자여야 할까요?


어린이들에게 어른은 자신들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입니다. 더 키가 크고, 힘이 세고, 아는 게 더 많죠. 자신보다 키가 크고, 힘이 세고, 아는 게 많은 다른 친구들도 있을 수 있지만 그래도 어린이와 어른은 다릅니다. 특별한 벽을 뛰어넘어야만 될 수 있는 존재 같은 것이죠. 


모야에서 오른손은 단지 어른이라는 사실만으로 손쉽게 권위를 부여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오른손의 역할이 모야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데에만 있었다면, 그 권위는 유용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더 중요했습니다. 작은손들이 그 공간을 안전하게 여길 것, 무엇이든 시도할 수 있는 공간으로 믿을 것, 그래서 주체적인 제작 활동을 마음껏 할 수 있을 것. 그것이 우리에게는 타협 불가능한 최우선 가치였고, 그것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오른손이 권위자여선 안 되었습니다. 그 권위는 오른손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해 작은손들이 눈치를 보게 만들고, 자칫 잘못 발휘되었다간 모야를 안전하지 않은 곳, 실패해서는 안 되는 곳으로 만들 게 뻔했으니까요. 어른이 없는 공간의 유일한 어른이라는 사실이 오른손을 모야의 정신을 무너뜨리기 가장 쉬운 자리에 둔 것입니다.


그렇다면 - 우리는 생각했습니다 - 오른손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나? 


오른손을 위해 제작한 배지는 작업자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든 시작할 준비가 된 듯 느슨하게 펼친 손엔 목장갑을 끼고, 주머니가 달린 앞치마를 걸치고 있죠.


우리는 오른손이 이 그림에서처럼, 무엇보다 작업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모야를 방문하는 다른 작은손들과 마찬가지로 이곳을 이용하는 작업자. 어른이지만 어른임을 내세우지 않고, 조금 더 숙련된 기술을 갖고 있을 뿐인, 작은손들과 동등한 작업자가 될 때야 작은손에게 오른손의 존재가 어른에서 동료로 전환되리라고 보았습니다.

매니페스토에서 모야에선 누구나 동등한 창작자라 선언한 것 기억나시나요? 그것은 애초부터 ‘작은손’만을 고려한 것이 아니었답니다.


그렇다면 - 우리는 또 생각해야 했습니다 - 동등한 작업자가 되기 위해선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오른손에게 주어진 거대한 과제


이렇게 하라, 이렇게는 하지 마라. 어린이를 대할 때의 바른 태도에 대해선 이미 수많은 사람이 수많은 이야기를 남겨두었으니 그걸 모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컴퓨터와 인터넷, 구글과 메모장만 있으면 가능했죠. 타이핑조차 필요 없었습니다. Ctrl+C, Ctrl+V만으로도 책 한 권 분량이 뚝딱 나왔으니까요. 하지만 그만큼의 자료를 모으고 나자 알 수 있었습니다.

                                     책 한 권으로는 부족하겠구나…


칭찬은 어린이의 자존감을 높여주지.

        그럼 칭찬을 자주 하자.

                잠깐, 너무 잦은 칭찬은 안 좋아.

            진심이 담기지 않은 칭찬도 해로워.

    진심만 담으면 돼?

            칭찬의 목적이 조종이라면, 칭찬은 독이 돼.

조종할 목적이 없으면 되는 거지?

                       덮어놓고 하는 칭찬도 안 좋아.

    그럼 칭찬을 하지 말까?

            칭찬이 어린이의 자존감을 높여주는데?

               .

               .

               .


마치 문장 하나하나마다 주석의 주석의 주석의 주석이 달린 책을 보는 기분이었습니다. 


오랜 조사 끝에 깨달은 것은 개별의 어린이 모두에게 적용되는 마법 공식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로리스 말라구찌의 시처럼 어린이는 백 가지의 언어, 백 가지의 손, 백 가지의 생각과 백 가지의 사고방식을 가진 존재이고, 부지불식간에라도 아흔아홉 가지를 빼앗지 않기 위해선 각각의 어린이와 춤을 추듯 어울려야 한다는 것을 말이죠. 어린이가 오른발을 내밀면 나는 왼발을 물리고, 어린이가 몸을 숙이면 나는 젖힙니다. 하지만 회전을 할 땐 같은 방향으로 돌아야 하죠.


오른손은 백 명의 (혹은 그 이상의) 어린이를 만나게 될 것이고, 어린이 각각이 백 가지의 춤을 출 것입니다. 백의 곱절의 곱절이나 되는 춤동작을 정확히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가르쳐 줄 사람이 있다고 한들 기억할 사람도 없을 테고요. 그래서 우리는 세세한 동작들 대신 춤을 추기 위해 필요한 요소들을 찾기로 했습니다. 춤을 추면서 스텝이 꼬일 수는 있지만, 상대를 넘어뜨리지는 않을 수 있는 원칙을 말이죠.

딱 들어맞는 비유는 아니지만, 다른 비유를 생각할 시간이 없네요.


1. 작은손의 ‘나다움’을 존중한다 
2. 작은손을 동등한 작업자로 대한다 
3. 각자의 속도를 존중한다 
4. 제작에는 정답이 없음을 명심한다



#원칙1. 작은손의 ‘나다움’을 존중한다

춤을 추기 위해선 우선 똑바로 마주 섭시다


‘나다움’은 사전에 올라와 있는 단어는 아닙니다. ‘인간다움’, ‘아름다움’, ‘꽃다움’처럼, 자신을 가리키는 ‘나’에 ‘성질이 있음’, ‘특성이나 자격이 있음’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인 ’답다’를 결합해 만든 단어입니다. 작년 극우 성향 매체와 동성애 혐오진영, 이에 동조한 국회의원 때문에 곤욕을 치른 단어이기도 하죠. 그들은 이 단어가 붙은 그림책을 허용하면 어린이들이 성적으로 방종한 청소년이 될 거라 주장했지만 그들의 호들갑과는 달리 ‘나다움’은 긍정의 단어입니다. 나에게 어떠한 특성이 있건, 그것이 ‘나’이기 때문에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 그리고 나와 다른 타인을 존중하는 태도가 담겨 있죠.


상대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야 한다.

그것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말처럼 당연하고, 새로울 것이 없으며, 일상 속에서 자주 무시됩니다.


어린이의 ‘나다움’을 존중한다면, 어린이가 몇 살이든, 우리가 보는 성별이 무엇이고, (아직 어리다고 해도) 스스로 생각하는 성정체성이 무엇이든, 성적지향이 어떻든 존중이 그 높이나 무게를 달리해서는 안 되며, 그러한 요소가 그 어린이를 판단하는 근거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어린이의 인종이나 장애 유무, 출신 지역, 종교. 또 보호자의 금전 상태나 사는 곳, 주거 형태, 가족 형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리다는 이유로 쉽게 용납되곤 하는 외모와 귀여움, 성적과 지능도 빠져선 안 됩니다. 


어린이의 ‘나다움’을 존중한다는 것은 위에서 열거한, 혹은 미처 포함하지 못한 어떠한 조건으로도 어린이를 재단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당연한 이야기 아니냐고 생각하실 수 있죠. 이 정도는 쉽지 않나? 싶으실 수도요. 하지만, 조금 더 자신을 면밀히 살펴보세요. 우리는 정말로 어린이를, 그리고 타인을 편견 없이 바라보고 있나요?


우리가 흔히 간과하는 것은 차별이 악의의 외피만을 쓰고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물건 뜯어보길 좋아하는 여자아이나 수학을 잘하는 여자아이에게 여자애가 기계를 좋아하다니 대단하네! 넌 여자앤데도 수학을 잘하는구나! 칭찬한 적이 있지는 않나요? 여자아이인데도 용감하구나. 같은 말은요? 그것은 분명 선의에서, 칭찬으로 한 말이지만 그 말을 듣는 어린이는 자신의 특성이 ‘정상성’을 벗어난 것이라 여기게 됩니다.


특별하다, 신기하다 여기는 것도 다르지 않습니다. “넌 남자앤데도 분홍색을 좋아하네.” “넌 무슨 여자애가 로봇을 좋아하냐.” 화자에겐 아무런 악의가 없었겠지만, 본인에게나 그럴 뿐입니다. 어린이에겐 확실히 전해졌습니다.


문제는 어린이가 가진 특정한 조건이 어린이의 기질, 성격, 능력을 결정짓는다는 고정관념에서 나옵니다.


여자는 언어에, 남자는 숫자에 강하다는 매우 오래된 편견이 있죠. 이미 많은 반례가 나와 점점 그 위력이 약해지고 있긴 하지만, 주변에 이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항변을 들을 때가 많습니다. “내가 그랬다.” “내 조카들이 그렇더라.”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이 그러더라.” 직접 겪어 아는 거라니, 그런 경험을 깡그리 무시하긴 어려운 일이지만, 발달심리학자 크리스티아 스피어스 브라운의 책 <핑크와 블루를 넘어서>에 따르면 딸을 키우는 양육자는 여자아이들은 숫자에 약할 것으로 여겨 무의식적으로 아들을 키우는 양육자보다 아이와 숫자 세기를 덜 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또 여자아이들이 더 잘 공감할 거로 생각해서 아들에게보다 더 많이, 자주 말을 걸고요. 사회에서 만나는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아이라면 응당 수학과 과학에 관심이 많을 거로 생각해 여자아이들보다 3배나 더 많이 숫자와 과학 전시물에 관해서 설명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죠.


결국 고정관념의 근거가 되는 사례조차 고정관념을 가진 어른들이 만들어 셈입니다. 그 과정에서 어린이들의 가능성을 하나씩 쳐내면서 말이죠.

젠더 하나만으로도 책 한 권 분량을 쓸 수 있지만, 그 얘기를 하는 글이 아니라 줄이겠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고정관념이 없는 어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슬프게도, 오른손 역시 어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작은손의 ‘나다움’을 인정해달라는 말로 오른손 자신의 고정관념이 작은손을 판단하는 데 쓰이지 않게, 그리고 그 고정관념이 작은손에게 이어지지 않게 경계해달라 요청하기로 했습니다.


함께 춤을 추기 위해 마주 선 어린이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

그것이 첫 번째 원칙입니다.



#원칙2. 동등한 작업자로 대한다

어떤 춤은 리드(Lead)가 명확합니다. 주도하는 사람과 따르는 사람이 정해져 있죠. 하지만 모야의 춤은 그런 방식이 아닙니다


작은손에게 동료이자 같은 작업자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선 오른손 역시 작은손을 동등한 작업자로 대해야 합니다. 당연한 이야기죠. 존중도, 관계도 상호적이니까요. 모야에 선생님이 없다는 얘기는 몇 번이나 강조되어 왔습니다. 모야에서 지식은 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습니다. 작은손과 작은손, 작은손과 오른손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죠. (그렇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원칙은 오른손만 마음을 다잡으면 되는 것인가?


물론 그것이 가장 중요한 요소나 예상되는 어려움이나 위험이 있다면 미리 치워두는 게 좋겠죠.


우리가 예상한 첫 번째 걸림돌은 이름, 호칭이었습니다.


보통 모야와 비슷한 공간에서 어른은 ‘선생님’으로 불리곤 합니다. 나쁘지 않은 선택입니다. 이모, 삼촌 같은 친족형 호칭은 부적절해 보이고, ㅇㅇ씨라고 이름을 부르는 건 지나치게 ‘쿨’한 ‘할리우드’ 느낌을 주지만 ‘선생님’은 주민센터에서 민원인을 부를 때도 사용될 만큼 안전한 호칭이니까요. 어린이들의 사회생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존재라 익숙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모야에서 오른손이 선생님으로 불리는 것은 곤란했습니다. 보통 이름은 누군가를 정의하는 가장 짧은 단어라고 하죠. 선생님으로 불리면 점점 그에 걸맞은 행동을 요구받게 될 것입니다. 모르는 것을 가르쳐 줄 것. 어려운 일을 친절히 도와줄 것. 작은손을 책임질 것. 선생님이라는 이름에 따라붙는 많은 일을 말이죠. 그리고, 그렇게 동등한 작업자와는 거리가 멀어지게 될 테고요.


그런 상황을 막기 위해선 미리 적절한 호칭을 정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고민은 짧았습니다. 괜찮은 사례가 바로 우리에게 있었으니까요.


릴리쿰의 구성원들은 각자 자신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단어로 자신을 소개합니다. 호랑, 까나리, 물고기와 같은 단어도 있고, 쟝씨, 결처럼 이름 같은 별명도, ‘상호’처럼 본명을 그대로 쓰는 일도 있습니다. 스스로 호칭을 정하고 그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는 건 개별성을 인정하면서도 소속감을 느끼게 합니다.


같은 규칙을 모야에 적용해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른손도 작은손도 자신이 원하는 별명을 정해서 그것으로 불리는 거죠. 좋은 해결책이다 싶어 별명을 적을 수 있는 스티커와 배지도 준비했습니다. 이렇게 걸림돌 하나를 치웠습니다.

오른손이 별명으로 ‘선생님’을 고르는 건 곤란하겠습니다만, 작은손이 그러는 건 재미있겠네요.


다음 문제는 안전이었습니다.


모야는 자유로운 제작을 권합니다. 재료나 도구의 선택과 사용에 허락은 필요 없습니다. 위험한 것으로 분류되는 도구를 사용할 때를 제외하면 말이죠.


원칙적으로 커터칼이나 글루건, 순간접착제 등의 도구는 정해진 위치에서 오른손의 관리하에 사용하도록 하였습니다. 안전을 위한 어쩔 수 없는 타협이었지만, 탐탁지는 않았죠. 동등한 작업자이던 동료가 갑자기 허락을 구해야 하는 존재가 되어버리면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까요? 거기다 그 동료는 어른이기까지 하니 심리적인 거리는 더 빠르게 벌어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궁리 끝에 어린이도 관리자가 될 수 있는 길을 만들었습니다.


작업반장’ 제도입니다.


작업실에서의 경험이 충분히 쌓여 혼자서도 안전수칙을 지키며 도구를 다룰 수 있을 것 같은  어린이가 있으면 오른손은 이 아이를 ‘작업반장’으로 임명할 수 있습니다. 작업반장이 되면 오른손의 허락을 받지 않고도 안전 테이블에서 위험한 도구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대신 도구를 다루는 걸 어려워하는 친구가 있으면 방법을 알려주고, 도와줘야 하죠. 오른손이 하는 일과 같습니다.


이 제도가 있다고 해도 작업반장이 될 수 있는 어린이가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능성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작업반장 제도는 어린이에게 오른손을 책임자가 아니라 조금 더 경험이 많은 숙련자로 여기게 합니다.


마지막 걸림돌은 칭찬이었습니다. 평가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평가는 타인이나 타인의 작품에 자신의 기준을 갖다 대고 그 수준과 가치를 가늠하는 일입니다. ‘평가한다’는 행위 자체가 그 기준을 가진 사람을 평가받는 사람의 우위에 올려놓죠. 하지만 모야에서의 작업은 경쟁이 아니며, 오른손은 심사위원이 아닙니다. 모두가 동등한 모야에서 잘했다, 못했다, 이 작품이 저 작품보다 낫다 같은 말을 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문제는 작업물에 대한 피드백과 평가의 구분이 모호하다는 점이었습니다.


의기양양, 작업물을 자랑하는 작은손에게 잘 만들었다, 멋지다 같은 말까지 하지 말아야 하는 걸까요? 부정적인 말은 좋지 않을 것 같으니 이 부분이 약해 보이는데 보강해보면 어떨까 하는 말은 삼켜야 할까요? 이건 O, X 팻말로는 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습니다. 상황에 따라, 어린이에 따라, 어린이와의 관계에 따라 그 답은 달라져야만 했으니까요.


결국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잘했다' '못했다' '이상하다'는 식으로 단순히 평가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주석처럼 달았습니다. 작품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맛있는 음식을 한입 가득 물고 카메라 앞에 선 예능인처럼, "이 노란 바퀴와 붉은색 몸통이 굉장히 잘 어울린다"라거나 "무게중심이 매우 안정되어 보인다”는 식으로 구체적인 게 좋겠다는 말도 붙였습니다. 그리고 어느 경우에도 어린이들 간의 비교로 우열을 가리지는 말아 달라는 당부도요.


지금 시점에서 우리가 낼 수 있는 답은 여기까지였습니다.



#원칙3. 각자의 속도를 존중한다

키가 자라는 속도가 다르고, 밥을 먹는 속도가 다르듯 춤의 속도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어린이라는 세계*’라는 책에 풋살화**를 신은 어린이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 추천합니다.

** 축구화가 아닙니다


어린이는 신발을 벗기 전, 끈은 어머니가 묶어주신 거라 나중에 다시 신을 때 자신이 잘 묶지 못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밤에 연습했으니 될지도 모른다고도 덧붙이죠. 저자는 이 어린이와 책을 읽다가 문득 어른이 되면서 신발 끈 묶는 일도 차차 쉬워질 거라고 얘기하는데 어린이가 대답합니다.


“그것도 맞는데, 지금도 묶을 수 있어요. 어른은 빨리할 수 있고, 어린이는 시간이 걸리는 것만 달라요.”


초행길은 항상 그 실제 거리보다 더 멀게 느껴집니다. 갈 때는 참 먼 것 같았는데 돌아오는 길은 너무 금방이라 놀랄 때가 있죠. 새롭게 시작하는 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간단한 일이라도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고민하고, 탐색하고, 판단을 의심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많은 것이 처음인 작은손에게는 더욱 그럴 것입니다. 오른손이 보기에 작은손은 어쩌면 답답할 정도로 느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느릿느릿한 시간이 충실히 쌓여야 익숙해질 수 있습니다.


속도를 존중해달라는 것은 그 느릿한 시간을 누릴 기회를 빼앗지 말아 달라는 뜻입니다. 


작업할 때는 참견하지 말고, 쉬이 도움의 손을 내밀지도 말 것. 잘 말하는 사람보다는 잘 들어주는 사람이 되어 주고, 지켜보는 시선에 조바심을 내지 않도록 적당한 거리를 지키며 기다려줄 것.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의자에 늘어져 있는 어린이도 머릿속에선 멀고 먼 나라의 숲속을 탐험하는 중일지도 모르니 원하는 대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내버려 두어 줄 것. 실천 가능한 스텝 몇 가지를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반대의 상황도 생각해야 했습니다. 분명 어린이가 개입을 요구할 때가 있을 테니까요. 


만약 질문을 하고 답을 구한다면, 어떤 문제를 바로 해결해줄 것을 요청받는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효율과 가성비가 미덕인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초등학생들조차 시간에 쫓기고, 어린이의 사색은 종종 게으름 취급을 받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떤 아이들은 쉽게 질문하고 도움을 청합니다. 고민하는 것보단 바로 답을 얻어내는 것에 익숙하죠. 하지만 모르는 것의 답을 찾고, 어려운 일을 해내기 위해 실수를 반복하는 것은 모를 때만 가능한, 두 번 누리기는 힘든 특권입니다.


아무리 고민해도 어린이에게 그 기회를 빼앗고 싶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 좀 심술궂게 구는 것 같기도 하지만 - 가능한 실패를 죄 해볼 수 있으면 더 좋을 것 같았습니다. 작은손이 지도를 만든다면, 어느 길은 끝이 막혀있다 해도 그 막다른 곳까지 가보아야 지도에 길이 추가될 테니까요.


이런 음흉함을 담아 그럴 땐 <답으로 가는 가장 먼 길을 제시하자>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방법을 알려주기보다는 방향을 제안해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볼 수 있게 하고, 직접 해결해주기보다는 따라 할 수 있도록 시범을 보여주는 것이죠.


질문에는 질문으로 답합니다.


어떤 재료를 어떻게 자를 수 있냐는 질문엔 톱과 칼, 가위, 필요하다면 망치까지 가져다 놓고 어느 걸로 자르는 게 좋을 것 같으냐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이건 어떻게 만드냐는 질문엔 무슨 재료를 쓴 것 같으냐는 질문으로 시작할 수 있죠. 종이일까? 천일까? 이 둘은 어떻게 붙인 거지? 접은 걸까? 붙인 걸까? 무엇으로 붙였을까?


답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어떤 시도는 터무니없이 실패할 테고, 어떤 시도는 맘에 차지 않겠지만 그래도 그 과정을 통해 어린이는 스스로 답을 찾고, 해내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 원칙은 짧고, 간단합니다.



#원칙4. 제작에 정답이 없음을 명심한다

춤이 어딘가 이상해 보이고 터무니없게 여겨진다면 새로운 춤이라서입니다


모야 매니페스토에서 작업에 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잘한 것도 없고 못 한 것도 없다.

시도만 있을 뿐 실패란 없다.

교재도 없고, 정답도 없다.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든다.

엉뚱한 생각을 환영한다.


상상에 정해진 방법이 있는 게 아닌 것처럼 모야의 제작에도 정답은 없습니다. 아이들의 제작은 강 속에 서서 징검다리를 놓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에 둔 목표가 어디이든, 일단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때그때 주변에서 돌을 하나씩 찾아 자신의 앞에 놓아야 하죠. 그때 눈앞의 디딜 돌 하나가 이상하고 불완전하다는 이유로, 혹은 방향이 틀렸다는 이유로 그걸 빼버린다면 아이들은 결코 건너편에 닿을 수 없을 것입니다. 설령 이상한 곳에 도착하게 된다고 해도, 뭐 어떻습니까. 그게 모험의 묘미 아니겠습니까 �




#모야의 집요정


모야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오른손이 있습니다.


작은손의 모든 여정에 배경처럼, 때로는 조언자로, 선험자로 오른손이 등장하죠.


모야의 오른손은 정의하기 어려운 존재입니다. 모야를 드나드는 것이 허락된 유일한 어른이지만, 어른이나 선생님으로서 존재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 존재. 어린이보다 잘하는 게 많을 테지만 대놓고 티를 내어서는 안 되고, 어린이들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가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방관만 해서도 안 되는 역할. 모야가 제대로 운영되게 하기 위해 많은 일을 하지만, 그렇다고 모야의 주인은 아니고, 지켜야 하는 규칙도 많습니다. 전편에서 적었듯, 권리랄 건 없는데, 책임은 잔뜩 짊어지고 있습니다. 마치 해리포터의 집요정 같은 존재죠. 이야기가 끝나도 스포트라이트가 비치는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이야기는 하나만 있는 게 아닙니다.


오른손에게도 모야는 자신만의 모험담일 수 있습니다.


모야가 막 시작된 지금, 오른손 역시 작은손들과 함께 시작점에 서 있죠.


릴리쿰에게 받은 4개의 주머니가 정말로 위기를 넘어가게 도와줄까요? 4개로 충분할까요?


그에 대한 답은 아직 아무도 모릅니다.


이 이야기는 이제 막 등장인물 소개가 끝났을 뿐입니다.







바통을 상호에게 넘깁니다. 


글 _ 물고기 (박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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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작업실 모야'는 릴리쿰, 씨앗재단, 씨프로그램이 함께 만든 도서관 속 어린이작업실로 집이나 일상에서 떠오르는 영감과 호기심을 손으로 표현해보는 '작업'을 위한 공간입니다. 어린이작업실 모야가 도서관을 찾는 또 다른 이유가 되고, 일상에서 창작하는 자신감을 북돋아주는 제3의 공간이 되길 바랍니다. 모야의 소식이 궁금하다면 [어린이작업실 모야의 비밀] 매거진을 구독해주세요!

*이 글에 사용된 이미지의 저작권은 릴리쿰, 씨프로그램, 도서문화재단 씨앗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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