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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개의 인간 Mar 25. 2022

카로트라페

내겐 너무 먼 당근

토요일 아침은 평소 아침보다 더 일찍 시작된다. 스케줄이 오전에 몰려 있기 때문에 일찍 일어나는 것도 있지만 중간에 밥 먹는 시간을 고려해 1시간 정도 더 일찍 일어나는 편인데 전날 화상으로 진행된 친구의 생일 파티에서 마신 맥주가 거했는지 늦잠을 잤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법, 잠이 우선시 되어버린 아침에 식사 시간이란 여유는커녕 사치에 가깝고 허기진 배에 물만 가득 채운채로 일을 마쳤다. 주로 주말의 할 일은 일을 마치고 나면 동네 친구를 만나 주중에 하지 못했던 일상을 함께하는 것이 전부다. 시간을 보니 약속시간이 다되어 전날 사다 놓은 바게트 빵을 굽고 미리 만들어 놨던 카로트 라페를 꺼내어 치즈와 햄을 넣어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이전에 라페를 먹어본 적 없다던 친구의 말에 라페를 만들면 샌드위치를 해주겠다고 했는데 머릿속으로는 몇 번이고 만들었던 라페가 이렇게 현실로 만들어 지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나는 베지테리언은 아니지만 평소 식단에 반이 야채로 차려질 정도로 베지테리언 식사를 즐긴다. 이전에도 몇 번 언급한 적이 있듯이 나의 장은 스트레스에 가장 취약한 부분으로 예민한 성질을 가지고 있고 취약한 만큼이나 탈도 자주 난다. 그래서 일이 바쁘면 바쁠수록 더욱더 식단에 신경을 쓰고 들어가는 재료를 고르는 데에 일정한 에너지를 쏟는다. 평소엔 없는 시간을 쪼개 틈틈이 책과 인터넷을 통해 제철음식에 대한 정보를 찾고 주말이 되면 신선한 재료를 공수하기 위해 산과 들을 누비며 한량 생활을 하기도 한다. 여유가 없을 땐 아쉬운 대로 메모를 해두었다가 가까운 시장에 들러 재료를 사 와 요리를 한다. 


큰 편식 없이 고루고루 먹는 채소 중에서도 가장 손이 안 가는 건 바로 당근이다. 당근의 제철은 12월로 알려져 있지만, 1년 4계절 내내 마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채소다. 나는 주로 야채를 깨끗하게 세척해 생으로 먹거나 소스가 최소한으로 가미된 샐러드를 먹는다. 하지만 시원한 오이를 한입 물었을 때에 오는 청량함과 아삭함에서 오는 식감을 선호하는 편이라 당근같이 이를 강하게 부딪혀 야만 딱 하고 부러지는 단단한 식감을 좋아하진 않는다. 그래서 요리를 할 때에도 당근을 잘 사용하지 않지만 며칠 전 카레를 하고 남은 당근의 신선도가 급격히 떨어지는 걸 발견하고는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 프랑스에서 거주할 당시 기억을 되짚어 식탁에 자주 올라왔던 메뉴로 카로트 라페를 만들기로 했다. 


프랑스에서는 carottes râpées (카 로트 라페)라고 불리며 당근을 강판에 놓고 채를 썰어 내어 살짝 소금에 절인 다음 머스터드와 올리드유 , 레몬즙, 후추를 넣고 버무린 샐러드이다. 메인 요리들과 식탁에 자주 올라오는 메뉴로 식당, 카페, 슈퍼마켓 어디서든 쉽게 구매가 가능한 간편식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당근 라페라고 불리고 다이어트 식단이나 베지테리언들을 위한 요리 레시피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만드는 데에도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고 재료가 단조로워 번거롭지 않게 만들 수 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강판에 당근을 채 썰어 내는 상상만으로도 먹고 싶은 생각이 짜게 식을 때가 많아 잘 만들지 않게 되는 요리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한번 만들어 놓으면 일주일은 간편하게 식단을 꾸릴 수 있다. 


주로 샌드위치를 해 먹는데 바질 페스토를 섞은 크림치즈를 호밀빵 양쪽 단면에 두껍게 바르고 라페를 두껍게 올려 먹는다. 재료를 이것저것 넣지 않아도 샐러드 자체에서 느껴지는 단맛과 신맛이 꾸덕한 크림치즈와 잘 어울리고 바질의 향이 더해져 풍부하지만 무겁지 않은 가벼운 맛을 느끼기에 충분하지만 조금 부족하다 싶다면 햄과 치즈를 넣어 풍미를 살릴 수 있다. 당근이 숙성이 되면서 수분을 상당히 머금고 있기 때문에 잘 찢어지고 결이 부드러운 식빵은 피하고 호밀빵이나 바게트 같은 밀도가 단단한 빵을 사용하는 것을 추천한다. 


샐러드 소스에 덮이지 않은 채소 자체에 본연의 향과 담백한 맛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내 기준에서는 완벽한 샌드위치라고 말할 수 있지만 한국에서 시중에 나오는 샐러드나 샌드위치에 익숙해져 있다면 다소 삼삼한 맛일 수도 있다. 소스에 맛이 강하지 않기 때문에 라페 하나만으로도 식사를 하기에 좋고 양이 부족한 느낌이 들거나 머스터드가 조금 부담스럽게 느껴진다면, 샐러드 파스타나 고기를 메인으로 한 요리에 곁들임 찬으로 먹어도 좋고 상추와 함께 토마토 한 개를 썰어 삶은 계란 혹은 닭가슴살을 넣고 라페를 듬뿍 얹어 올리브유를 한 바퀴 둘러 버무려 먹어도 좋다. 이외에도 여름철에 자주 먹는 냉소바나 냉가락국수에 올려 먹어도 깔끔하니 맛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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