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옮기기

by 일개의 인간
우리가 생활하는 12평 남짓한 작은 평수의 오피스텔에는 단 하나의 룰만 존재한다. 매일 부딪히는 사소한 일로 얼굴을 붉히거나 큰소리가 나거나 냉랭한 분위기를 풍기는 일들은 모두 차단하고 평온함이 깃드는 '쉴 곳'으로 만들 것. 이 단 하나의 룰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매일 밤 9시 오늘의 안건을 들고 식탁에 앉는다.


전 씨가 다니던 회사가 코로나로 인해 예정된 퇴사 날짜에서 1개월을 남겨두고 문을 닫게 되었고 정리와 동시에 부산에 내려오게 되었다. 이미 같이 지내기로 마음을 먹고 결론을 내린 거라 같이 지내는 것에 대한 고민을 한다기 보단 같이 지내기 힘들 때가 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에 대한 고민이 아직 진행 중이었다.


전 씨가 전에 살고 있는 집에서 짐을 정리하는 며칠은 '짐을 어떻게 가지고 올 것인가'가 우리의 사전 안건이었다. 여기서 어떻게란 단순히 짐을 어떻게 옮길 것인가가 아니라 얼마만큼의 짐을 가지고 올 것인가 였고 전 씨가 통화로 가지고 올 짐을 하나씩 언급할 때마다 짐이 나의 기준치를 넘어서면 어떡하지 하고 내심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 "짐은 거의 다 쌌는데, 캐리어 큰 사이즈 하나랑, 옆으로 매는 가방 큰 사이즈로 둘, 그리고 백팩 이 정도 될 것 같아."


큰 사이즈 하나와 다른 유형의 큰 사이즈 둘, 총 세 개의 짐가방, 짐이 얼마나 많길래 큰 사이즈가 3개나 필요한 것일까.


- "너무 많지 않아? 나는 집이 짐 보관소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사람 사는 곳이 필요 없는 것들로 메워지면 안 되잖아."


전 씨와의 통화 중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던 것이 말로 흘러나왔고 반쯤 짜증 섞인 나의 감정까지 고스란히 수화기 너머로 전달되었다.


- "아, 보기엔 얼마 안 되는데 날씨가 추워질 것을 대비하다 보니까 옷 부피가 좀 있어서 가방이 늘어났어."


전 씨는 나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럼 일단 최소한 필요한 것만 챙기고 나머지 옷들은 본가에 둘까 라고 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전 씨가 생활에 필요한 것들은 모두 챙겨 오라고 했다. 나의 기준에만 맞춰져 있다 보니 내게 필요 없음이 당연히 전 씨에게도 필요 없음으로 적용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이곳저곳을 다니며 캐리어 하나로 모든 짐을 실을 수 있었던 나의 일상은 장기적으로 지낼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을 가진 후에도 그 무게는 변하지 않았다. 식탁과 침대 그리고 몇 가지 식기구 들을 제외한 나의 생필품들은 여전히 캐리어 하나로 정리가 끝난다. 짐을 더 늘릴 수 있는 여유 공간도 있지만 더 늘리지 않는 건, 이미 내가 가진 물건만으로도 충분히 생활이 가능하고, 물리적으로 필요 이상의 짐은 마음의 짐이라고 여겨 주기적으로 정리를 하기 때문에 내 짐은 항상 일정함의 유지가 가능했지만 이건 나의 생활 방식일 뿐 전 씨에겐 해당사항이 없었다.


나와 다른 사람이 내 세계로 들어온다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진 것 또한 같이 온다는 것인 듯하다. 그래서 그게 짐이든 그 사람의 생활 방식이든 그 사람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뭐는 되고 뭐는 안된다가 구분되어선 안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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