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생활하는 12평 남짓한 작은 평수의 오피스텔에는 단 하나의 룰만 존재한다. 매일 부딪히는 사소한 일로 얼굴을 붉히거나 큰소리가 나거나 냉랭한 분위기를 풍기는 일들은 모두 차단하고 평온함이 깃드는 '쉴 곳'으로 만들 것. 이 단 하나의 룰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매일 밤 9시 오늘의 안건을 들고 식탁에 앉는다.
전 씨는 이전 직장을 마무리하고 내려와 다음날 바로 출근을 했다. 일이 없을 때에도 쉬는 것보단 뭔가 라도 하면서 몸을 움직여야 하는 사람이라 어떻게 보면 부지런하고 성실하지만, 내 관점에선 때에 따라 여유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나는 전 씨에게 고정적인 지출을 감안하고 바로 일을 구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라면, 굳이 바로 일을 시작할 필요가 없지 않나라고 며칠 쉬는 것을 제안해 봤지만, 전 씨는 마음이 불편했던지 부산에 내려오기 전부터 구직을 시작했다.
내년에 유학을 계획하고 있는 전 씨는 지금으로서는 상황상 회사를 오래 다닐 수 없어서, 이전에 하고 싶었던 일을 중심으로 이전과는 다른 분야에 일을 해보고자 면접을 봤는데, 생각보다 수월하게 진행이 되었지만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첫 출근 날, 하고 싶었던 일을 한다는 기대에 부푼 표정으로 집을 나섰고, 집으로 돌아올 땐 얼굴에는 웃음기가 싹 가신 채로 물에 풀어진 종잇장 마냥 흐물거리며 돌아왔다. 두 번째 날에도, 세 번째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얼굴은 웃고 있지만 어딘가 기운 빠져 보이는 모습으로 퇴근을 했다.
전 씨가 출근한 지 일주일이 되던 날, 퇴근하는 길에 전 씨에게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 "나 오늘 잘렸어."
- "잘됐어. 바로 올 거지? 일단 와서 얘기하자."
해고 소식이었다. 이미 며칠간에 행적으로 보아 충분히 예상하고 있던 터라 우리 둘은 담담했다. 처음이라 손이 빠르지 않은 전 씨에게 정해진 시간 안에 일을 끝내야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텃세 아닌 텃세도 가미해 일을 스스로 찾아 하라는 식의 무언의 압박도 만만치 않았다. 오히려 나는 이제 전 씨의 세상 다 잃은 표정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내심 안심이 되었다.
집에 돌아온 전 씨의 표정이 썩 좋진 않았지만 미세한 안도감이 느껴졌다. 이 날 저녁 우리는 배달음식을 시켜두고 맥주 한잔을 기울이며 해고당함에 대한 축하를 하며 앞으로의 일에 대해 짧은 논의를 하였다.
- "이왕 이렇게 된 거 잘됬어! 음식도 급하게 먹으면 체하잖아, 이참에 조금 쉬는 게 어때?"
- "흠. 사실은 쉬는 것도 좋은데, 쉬어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쉴 생각에 좋기보단 불안감이 먼저 오더라."
- "그렇지, 충분히 그럴 수 있어. 일이 있을 때 쉬는 거랑 일이 없을 때 쉬는 것은 또 다르게 느껴지지."
- "쉬었다가 일이 안 구해지면 어떡하지 라는 불안함을 느끼느니 차라리 바로 일을 하자 라고 생각했는데 말처럼 쉽지가 않네.."
(전 씨는 입에 물고 있던 젓가락을 식탁에 내려놓고 고개를 떨구고 식탁 모서리에 시선을 둔다.)
-"괜찮아! 수입이 있어야만 일이 아니잖아. 우선은 네가 해야 할 일을 먼저 하자. 바로 출근하느라 못하고 미뤄뒀던 일부터 하나씩 처리하고 가져온 짐 정리도 하고, 그러면서 다시 구직도 하면 되니까 이런 일로 기죽지 마!"
(전 씨의 시선은 내게로 향하고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린다.)
- "그래...!"
이 일로 전 씨는 일을 잠시 쉬고 개인적인 일을 하면서 다시 구직을 시작하기로 했다. 나 자신에게만 쏠리던 관심이 특정한 한 사람에게 방향을 돌리면, 내가 마치 독심술이라도 하는 것 마냥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생긴다. 육감적으로 느껴지는 분위기를 읽자면, 전 씨는 쉽게 마음을 못 내려놓고 있는 듯 하지만 또 밥은 삼시세끼 복스럽게 잘 먹는 걸 보니 아직까진 크게 걱정할 단계까지는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