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생활하는 12평 남짓한 작은 평수의 오피스텔에는 단 하나의 룰만 존재한다. 매일 부딪히는 사소한 일로 얼굴을 붉히거나 큰소리가 나거나 냉랭한 분위기를 풍기는 일들은 모두 차단하고 평온함이 깃드는 '쉴 곳'으로 만들 것. 이 단 하나의 룰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매일 밤 9시 오늘의 안건을 들고 식탁에 앉는다.
아무리 좋은 사이어도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머리로는 알지만 몸으로는 행동하지 못하는 것, 현 인간관계의 클리셰한 부분으로 난 이것을 몸소 실천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적당한 거리 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 거며, 어느 지점에서 어느 지점까지가 일정하게 유지가 가능한 범위인지 대략 짐작도 가지 않았다. 순탄치 않은 지나간 연애로 몇 가지 배운 점이 있지만 이미 깨우친 것도 막상 둘만의 세계로 들어가고 나면 '0'으로 세팅이 된다.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나는 작업실에 출근을 하지 않는 날엔 주로 집에서 일을 한다. 전 씨 또한 직장을 구하는 동안은 직장생활을 할 때에 비해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둘이 같이 있는 시간도 그만큼 늘었다. 그간 장거리 연애를 해왔기 때문에 같이 있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어서인지 하루 이틀은 알콩달콩 좋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흔히 사람들이 말하기를 오래 붙어 있으면 싸운다는 소리를 왜 하는지 우리는 잘 공감하지 못했다.
그 후 일주일이 지나고, 우리는 처음으로 다퉜다. 지금 돌이켜 보면 별일도 아닌데, 단지 신경이 쓰인다는 이유 하나로 기분이 상했었다. 싸운 당일 저녁, 평소처럼 배부르게 식사를 마치고 나는 작업실에서 마치지 못한 일을 하러 책상 앞에 앉았다. 전 씨는 갑자기 조용히 있더니 카페를 다녀오겠다고 하면서 짐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말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묘하게 기분이 언짢은 분위기가 맴돌았다.
- "갑자기? 카페를? 이 늦은 시간에? 곧 잘 시간이야."
- "그냥 카페에 좀 있다 오려고..."
- "뭐야,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 "아니. 다녀올게"
전 씨가 나가고 난 후 내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가득했다. 혹시 피곤해서 자고 싶은데 내가 일하느라 방해가 된 건 아닌지, 보조등 빛이 너무 밝았던 건지, 갑자기 속이 안 좋은 건지 온갖 추측이 난무하여 일을 하면서도 밖에 나가 있는 전 씨에게 온 신경이 쏠려있었다.
한 시간쯤 지나고 전 씨가 집으로 돌아왔다. 답답한 마음에 전 씨에게 대화를 요청했고 우리는 다시 식탁에 마주 보고 앉았다.
- "내가 아무것도 아닌 일에 신경이 예민해진 걸 수도 있어. 아무 말은 하지 않았지만 행동에서 읽히는 것들이 있잖아. 네가 갑자기 잘 있다가 아무 말 없이 나가버리면 나는 당황해.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영문을 몰라서 나 혼자 답을 찾느라 일에 집중이 안되더라."
-"응? 카페 간다고 했잖아"
-"네 말은 그랬지, 근데 네 행동은 그걸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잖아."
-"아니, 사실은 그냥 좀 답답해서 혼자 있고 싶었어. 며칠 집에만 있다 보니까 스트레스가 쌓였나 봐. 혼자 있을 땐 음악이라도 크게 틀어놓고 있는데 네가 일한다니까 방해하고 싶진 않아서... 나갔던 거야.."
-"... 우리가 요즘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까 좋은 것도 있지만, 답답한 마음이 드는 건 나도 이해해. 근데 혼자 있을 땐 네 맘대로 외출했다 돌아와도 상관없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둘이잖아. 네가 느끼는 감정을 너의 얼굴 표정에서 알고 행동으로도 느껴. 다음부턴 문득 생각에 필요 없다고 하는 말도 상대가 걱정할 것 같으면 의식적으로 하자."
- "응. 미안해. 생각이 짧았다.."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아줄 거란 기대에 부응하는 관계는 어떻게 보면 참 이상적이다. 한 사람과의 관계가 오래 무르익으면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하나 둘 쌓이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에 말과 행동이 내 생각과 정확히 맞아떨어진다고는 할 수 없는 것 같다. 모든 일이 그렇듯 잘 알았다고 한 것들이 지나고 보면 모르는 것이 투성이었고, 속단하여 넘겨짓거나 그래서 말을 하지 않거나 그냥 넘어가는 것들이 많았다.
적당한 거리란 아직도 체감적으로는 확 와닿지 않지만, 가까이 있어서 무뎌지는 것들을 혹은 마음 졸이거나 좁혀지는 것들을 적당한 타이밍의 알아챌 수 있는 거리가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