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

:있어야 할 것이 없어지거나 모자람 혹은 다 써 없어짐

by 일개의 인간

8개월 만이다. “P한테 문자 왔어 방금.”내가 말했다. “P요? 언니 유튜브 봤어요? 여자와 남자가 헤어지고 난 후에 각자의 입장 차이라고 해야 하나? 여자는 헤어지고 나면 힘들어하고 남자는 시간이 좀 지난 후에 현타가 온대요. 그래서 새벽에 “자니?”라고 문자 보내는 게 거기서 나온 말이잖아요. L이 깔깔거리며 말했다. K와 나도 덩달아 웃었다. “그리고 또 뭐라고 문자 왔는데?” K가 물었다. “내 카톡에 올려놓은 메인 사진 보고 남자 친구 멋있대.” “어? 그거 박사님 아니에요!?” L이 해맑은 표정을 하고 물었다. “내가 좀 멋있게 생겼지. 그냥 남자 친구라고 해.” K는 입 꼬리를 살짝 올리고 체념한 듯 말했다. 이상하다. P란 사람은 남아있는데 그 사이에 감정이 없다. 사랑도 그리움도 미움도 원망도 슬픔도 남아있지 않았다. ‘네가 행복해 보여서 좋다.” P에게 문자가 왔다. “고마워.” P는 요즘 술을 줄이고 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 뒤로 한 두 통의 문자가 더 왔지만 나는 답을 하지 않았다.


오늘 저녁은 타코를 만들었다. L은 사진을 찍기 위해서 그릇에 위치를 바꿔가며 보기 좋게 플레이팅을 한다. “얘는 뭘 해도 먹고살 거야.” K가 말했다. L은 그냥 하는 정도가 아니라 잘한다. 잘하는 게 중요하지는 않지만 본인이 잘할 수 있는 것에 정성을 쏟고 세심함을 놓지 않는 건 중요하다. 우리는 컵에 와인을 따르고 잔을 부딪혔다. 영원히 남을 것처럼 사랑을 나눴던 남자와는 이별을 하고 엉망이 되어버린 내 일상을 친구들과 함께한다. 이들은 상처 받고 비뚤어진 나의 마음을 바로 잡아준다.


저녁을 먹고 난 후 디저트와 함께 남은 와인을 나눠 마셨다. “넌 어떤 점에 결핍이 있어? L에게 물었다. “공감이요. 공감을 잘 못해요. 보통 사람들이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들이 있잖아요. 근데 전 크게 공감이 잘 안 가요.” “넌?” K에게 물었다. “돈.” “굉장히 현실적인 답인데?” 내가 말했다. “나는 현재 내 인생에서 제일 많은 시간을 일에 투자하고 있잖아? 박사 과정 준비할 때 돈이 궁핍해서 생활이 안될 정도였어. 돈이 없으면 선택지가 없어. 예를 들어 관계를 중심으로 사람을 만나야지 만나지 말아야지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만날 수 없는 거야. 내 생활이 당장 급급한데 사람 만날 여유가 어디 있겠어. 관계에 유지도 돈이 있어야 가능하더라. 그때의 내 인간관계는 ‘나를 도와줬던 사람들 중심으로만 이루어진 관계였지. 내가 원해서 맺는 관계나 서로 주고받는 관계는 일절 없었어.” 나와 L은 와인 병을 집어 들어 비어 있는 잔을 채운다. K가 말을 이어간다. “내가 제대로 된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한 게 주말마다 마트 가서 가격 안 보고 먹고 싶은 대로 장을 보는 거였어. 나 혼자 사는데 한번 장 볼 때마다 10만 원 이렇게 나왔으니까. 돈이 없으니까 내가 뭘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알아볼 시간도 갖지 못한 거야. 내 취향이 없어. 먹는 것만 해도 이것도 먹어보고 저것도 먹어보고 돈을 써봐야 내 취향이라는 게 생기는데 나는 그런 게 없었어. 지금은 내 주위 사람들이 나를 보면 바로 떠오르는 게 있는데 그때는 그냥 그런 애. 내가 나에 대해 잘 모르니까 표현할 게 없어. 그래서 남이 볼 때도 무채색 인간으로만 기억에 남는 거지.


“언니는요?” L이 내게 물었다. “나는 찾는 중이야.” K가 나를 보며 말했다. “사람.” “사람이요? 왜요? 언니 주위에 친구들 많잖아요.” K는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람 같았다. “나는 한번 곁을 내주는 건 힘든데 한번 곁을 내주고 나면 사람을 미워하지 못해. 그래서 사람을 대할 때 여기까지 라는 선을 그어 놓고 나를 더 이상 깊게 보여주지도 않고 반대로 깊이 들어가려고 하지도 않지. 그래서 많은 사람들과 적당하게 유지는 가능하지만 늘 불안해. 아는 사이에서 깊은 사이로 발전을 하려면 선을 넘어야 하는데 나는 사실 그러는 척 만해. 그래서 대부분 시간이 흘러서 자연스럽게 맺어진 관계가 주가 되고 그 시간을 공유하는 걸 넘어서 같이 성장하는 관계가 있나? 뭐, 있긴 있겠지. 있었다던지. 모르겠다. 아무튼 내 안에 사람이 없으니까 오로지 나 혼자만 존재하는 거야.” 그렇다. 나의 SNS 에는 주로 혼자 보단 친구들과 찍은 사진을 많이 올린다. 어떻게 보면 이 부분이 결핍 상태에 있으니 나에게 남에게 과시를 하는 것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Forgive Yoursel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