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머리 고해성사

우리는 늘 잘못된 선택을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는 옳은 말을 해야 한다.

by 일개의 인간

나는 가끔 K와 밥을 먹을 때 가장 최근의 저질렀던 잘못을 시인한다. 주로 개인적인 것 들로 K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들이다. 나는 내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친구에게도 가족에게도 바로 말을 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스스로 정리가 된 다음에야 말을 꺼낸다. 무거운 것을 오래 담아 두지 못하는 타고난 천성 덕에 말을 하기까지의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는다는 장점도 있지만 이 과정은 여러 사람을 괴롭게 한다는 단점도 있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 하는 말은 과정이 뭉툭하고 말에 꼬리가 날카롭게 뻗친다. 그렇기 때문에 듣는 사람이 오해하기 쉽고 상대 또한 기분이 좋지 않다면 의도하지 않게 서로의 기분에 불을 지르게 된다. 이럴 땐 최대한 말을 아끼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긴 하나 알면서도 지켜지지 않는 것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상대가 모르는 나의 잘못을 시인할 때는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 첫째, 분위기를 무겁게 조성하지 말 것. 둘째, 지나간 일에 연연하지 않을 것을 분명하게 할 것. 셋째, 상대가 어떤 반응을 해도 받아들일 것. 그래서 나는 주로 밥을 먹는 자리에서 운을 띤다. 운을 띄는 방법 또한 다양하다. 내 상황과 비슷한 스토리를 가진 영화를 끌어와 자연스럽게 내 이야기로 넘어가는 방법. '그거 알아?'라는 말로 상대에 궁금증을 자아내는 방법. 상대가 먹는 것에 집중하는 사이 무턱대고 '이런 일이 있었어' 라며 일단 말을 던지는 방법. 나는 주로 '그거 알아?'라는 말로 운을 띄고 상대에 궁금증을 자아낸 다음,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분위기를 고려해 영화 이야기에 내 이야기를 투영시키는 방법을 쓴다.


보통 나와 K는 많은 대화를 나누지만 연애를 주제로 말을 하는 건 드문 일이다. 나는 상대가 있어도 최대한 숨기고 K는 지난 일이라 말을 하지 않는 듯하다. 나는 K에게 P와 관계를 정리하고 나서야 P와 나의 관계에 대해 자세히 말을 할 수 있었다. 그 전엔 P에 관한 얘기를 아주 가끔 한 것 외엔 말을 한 적이 없다. P의 전 여자 친구는 바람을 폈다. P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1년 넘게 그 여자와 관계를 유지해 왔다. P는 그 상처를 못 잊어서 매일 같이 술을 먹었다. 술을 먹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고 했다. 전 여자 친구가 바람을 핀 것처럼 나 또한 그럴 거라고 생각했고, 이 불안한 마음을 잠재우기 위해 술을 먹는다고 했다. P가 술을 먹지 않을 땐 평온해 보였지만, 술을 입에 대고 나면 평온은 사라졌다. 술이 술을 불렀고 감정을 복 돋았다. P는 망가질 때로 망가진 불안한 감정을 날것 그대로 내게 퍼부었다. 매번 반복되는 이 상황이 싸움으로 번졌고 한번 싸우기 시작하면 멈추기 어려웠다. 누구 하나 뜯겨서 떨어져 나갈 때까지 우리는 서로를 할퀴었고 지쳐서 이별을 고할 때면 P는 미안하다 사과를 했다. 난 그때마다 받아주고 또 받아주고 한 일이 5년이나 흘렀다.


우리는 서로의 욕구를 채워주는 관계로 시작을 했다. 나는 갈수록 P에게 단순히 잠을 자는 상대가 아닌 그 이상이 되길 바랬고 희망을 놓고 싶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상처를 받을 수 있다. 상처 받은 사람에 고통을 다 알 수는 없지만 그 사람을 헤아릴 순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온전한 마음으로 완전한 사랑을 주면 그 사랑이 언젠가는 상처를 덮어줄 줄 알았다. 그럼에도 나는 P와 나의 관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이미 시작할 때 이 사실을 알고도 P를 정리하지 못했다. 잘못된 선택을 한 나 자신이 경멸스럽고 혐오스러울까 봐 그런 나 자신이 가엾게 느껴질 까 봐 겁이 나서 놓지 못했다.


P를 떠난 후 나는 실제로도 나 스스로가 나에게 입힌 상처에 대해 심하게 고통스러워했다. 나는 5년 동안 나 자신에게 해왔던 자해를 K에게 털어놓았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 자신을 용서하고 나서야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묵묵히 듣고 있던 K는 '이제 알았으면 된 거다. 다음에 똑같이 하지 않으면 된다.'라고 말했다. 나는 K에게 잘못을 시인하면서 동시에 두 가지를 배웠다. 상대에 잘못에 대해 비난을 하지 않는 것과 담담하게 듣는 태도를 가질 것. 내게 K는 친구지만 그 이상으로 존경스러운 부분이 많아 닮고 싶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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