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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기언 Sep 08. 2022

마흔셋, 책방 알바생입니다만

마흔셋, 책방 알바생입니다만,


“저… 여기 오픈 한건 가요?”


오전 환기를 위해 책방 문을 활짝 열어놓고 밤새 숨 막혀 돌아가시는 줄 알았다며 아우성대는 식물들에게 분무기로 물을 주고 있었다.

낯선 여자의 목소리는 환영이다.

손님이므로.

그러나 아직 낯선 남자의 목소리는 두려움이 살짝 느껴진다. 남편이나 학원 선생님 말고는 성인 남자와 대화를 해볼 기회가 거의 없는 나날이었기에 굵은 목소리는 일단 경계의 대상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실루엣의 여자가 책방 문 앞에서 서성이며 성큼 들어오지 못한 채 물음을 던졌다.

얼른 카운터 쪽으로 가 벗어둔 마스크를 쓰고 그녀 쪽으로 다가가며 눈을 마주쳤다.

연보라색 새부리형 마스크를 쓴 그녀의 눈과 마주치며 왠지 낯설지 않음을 느꼈다.


“네. 어서 오세요. 오픈했어요^^”


마스크를 쓴 채 표정을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은 눈동자와 눈 근육을 이용하여 최대한 웃고 있다는 뜻의 눈가 주름이다. 화가 났을 때는 반대로 눈에 힘을 다 빼고 45도 아래쪽을 보며 내리까는 게 나만의 방법이다.

여자를 바라보는 내 눈 근육은 저절로 반달 모양을 상상하여 만든 눈웃음을 지어 보이게 했다.


“여기는 책만 볼 수 있는 건가요? 아님 차도 같이 파세요?”


우리 책방이 북카페라는 단어를 굳이 쓰지 않는 이유는 예쁘게 꾸며진 공간에서 책은 읽지 않고 삼삼오오 모여 커피나 홀짝거리며 수다로 공간의 평화로움을 흔들어깨는 게 싫은 사장님의 운영방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커피와 차를 팔고 있으며 굳이 책을 사지 않더라도 앉아서 펼쳐 볼 수 있게 비치용 책들을 꽤 구비해 놓았다.


“아… 이쪽은 판매용 책들이고요, 저기 테이블 쪽 책들은 비치용이라서 차 마시면서 자유롭게 읽으실 수 있어요.”


조심스레 책방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걸음마다 신중하면서도 발자국 소리를 내리 않으려는 조심성이 느껴졌다.

안경 너머로 살짝살짝 내비치는 그녀의 눈은 진열된 책들의 제목을 하나하나 읽어보면서 관심 있는 책들은 두 손으로 매우 조심스럽게 옆의 책들이 쓰러지지 않도록 뽑았다.

그런 그녀를 약간의 거리를 두고 지켜보다가 카운터 뒤로 와서 마침 내 할 일이 이곳에 있어서 나대로 일을 할 테니 편히 책을 둘러보시길 배려하는 듯한 행동의 뉘앙스를 풍겼다.


“저… 아이들 볼만한 책들은 없나요?”


한참 동안 책들을 탐사하듯 책장에 꽂힌 책들과 중앙에 둔 테이블 위에 진열한 책들을 하나하나 본 후 여자는 어느새 내가 있는 카운터 쪽으로 와서 나를 보며 물었다.

정면에서 마주한 그녀는 대략 나와 비슷한 키에 비슷한 몸매였으나 얼굴이 더 작아서인지 훨씬 비율이 좋아 보였다. 훤칠한 이마가 돋보이도록 8:2 가르마를 자연스레 넘긴 보브 스타일 헤어는 희끗희끗하게 흰머리가 보였지만 자연스러운 컬이 우아함을 배가시켜 주는 듯했다.

오른쪽으로 살짝 내려 c컬로 마무리된 앞머리는 동그랗고 깔끔한 은테 안경과 절묘하게 잘 맞아떨어졌다.


“아이들 책은 요 아래 책장에 있고요, 좀 큰애들 같은 경우는 건너편 책장에 있어요. 혹시 몇 학년 아이 책을 찾으실까요?”


씻어 말려둔 컵들을 찬장에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여자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책장들을 손으로 가리켰다.

초등학교 저학년을 위한 그림책들은 카운터 바로 아래쪽에 위치했다.

여자는 허리를 숙여 잠깐 보는 듯하더니 반대쪽에 위치한 낮은 책장에 꽂힌 청소년을 위한 책들을 향해 돌아 무릎을 쭈그리고 앉았다.

나는 냉큼 이케아 유아용 의자를 여자에게 슬쩍 내밀었다.


“아 네 고맙습니다. 저희 딸이 초등학교 6학년인데 책을 워낙 좋아해서요…”

“아 그러세요? 그럼 이건 어때요? 요새 고학년 여자애들 사이에서 인기 많더라고요”


실은 청소년들이 뭘 읽는지 잘 모른다.

내 아이가 아직 어리기도 하고 내가 읽을 책 고르고 읽는 데에만도 시간이 모자란 판에 아직 미성숙한 사춘기 근접한 아이들이 읽는 책까지 관심을 둘 여유가 없었다.

다만 사장님이 진열해 둔 책들을 교보문고 웹사이트 들어가서 검색해 추천의 글이나 홍보용 글귀를 읽다 보면 이 책들이 성인을 위한 책인지, 청소년을 위한 책인지, 청소년 중에서도 여자아이들을 위한 감수성 건드리는 소설인지 남자아이들을 위한 흥미 위주의 책들인지를 가늠할 뿐이었다.

이 책이 베스트셀러라면 인기가 많은 책일 테고 인기 많은 책들은 손님에게 추천하기에 무리가 없다.

누구나 관심을 가지고 몰입하기에 어렵지 않은 글이 담긴 책이라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흐음…글쎄요. 저희 아인 이런 소설류는 별로 안 좋아하더라고요”


여자는 내어준 의자에 끝내 앉지 않고 곧바로 일어서서 카운터 쪽으로 다시 몸을 돌려 음료 메뉴판을 읽는 듯했다.

나도 다시 카운터 뒤쪽으로 와 그녀가 음료를 주문할 것을 대비해 마우스를 흔들어 포스기 화면이 열리도록 했다.


“얼그레이 되나요?”

“네 그럼요^^ 그걸로 드릴까요?”

“네 너무 진하지 않게 부탁드릴게요.”

“아.. 네 알겠습니다. 4,500원입니다.”


여자는 카드를 건네고 등 뒤에 하얀 테이블과 소파 등을 둘러보며 앉을자리를 물색했다.


“앉아계시면 가져다 드릴게요”

“밖에서 봤을 때랑 다른 분위기네요. 창 밖 경치가 너무 좋아요. 인테리어도 예쁘고…”

“네 그렇죠. 2층이라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아서 그렇지 막상 올라와서 보신 분들 다들 경치가 좋다고 하시더라고요”


사실이었다.

트램이 깔릴 예정인 길을 사이에 두고 넓고 편편한 길 양쪽으로 새 아파트를 낀 상가가 깨끗하고 번듯한 모습으로 쫙 늘어서 있다.

아스팔트 사이사이 나중에 트램이 달릴 길에는 푸릇한 잔디들이 깔려있고 2층 높이만큼 훌쩍 자란 나무들이 눈을 피로하지 않게 연둣빛을 흩날리고 있다.

건너편 상가들도 이국적인 붉은 벽돌 외관에 스타벅스 녹색의 그늘막을 쳐놓거나 베이지색 간판들로 건물의 외관을 더 돋보이게 한다.

그래서 이쪽에서 보이는 건너편의 상가 모습 자체가 통창 너머 액자처럼 예뻐 보인다.


책방 내부는 눈부신 화이트를 기본으로 두닷에서 주문한 콰트로 시리즈 테이블과 책장으로 가구와 공간의 색에 통일감을 주었으며 한 중간에 놓인 둥근 원 테이블은 네모반듯한 책장과 공간에 어떠한 리듬감을 부여하고 있었다.

군데군데 개업 때 들어온 대형 화분들이 저마다의 개성적인 모습으로 녹색이 주는 편안함을 선사하고 있고, 샛노랑과 에메랄드 녹색의 의자들은 화이트의 단조로움을 생동감 있게 콕콕 박혀 지루함을 덜어주는 효과가 있었다.

 

여자는 창가 쪽 벽이 등으로 오는 의자를 하나 빼서 앉고 옆자리엔 어깨에 메고 온 에코백을 살포시 두고는 테이블 위에 놓아둔 비치용 책들을 관심 있게 보기 시작했다.

나는 사장님이 비를 뚫고 광교에 있는 갤러리아 백화점까지 방문해서 사온 고급 영국 홍차들을 둘러보고 얼그레이라고 씌여진 철제 통을 집어 들었다.

진하지 않게 라는 주문을 추가로 받았는데 처음으로 내리는 홍차라서 물 몇 리터에 스푼으로 어느 정도를 해야 할지 난감했다.

책방을 지키고 앉아 있을 때 주구장창 일리 머신에 커피 캡슐만 꽂아 내려먹었던 터라 홍차는 적정량을 어떻게 맞춰야 할지 고민되었다.

일단 티팟에 정수기 온수 버튼을 눌러 120미리씩 두 번 물을 받았다.

그리고 통의 뚜껑을 열자 향긋한 꽃향인지 풀향인지 고급스러운 느낌의 향이 훅 올라오는 걸 느꼈다.


‘에라이 모르겠다. 일단 한 스푼 넣고 진하다 그러면 물을 더 추가해주면 되겠지’


어느 식당이나 카페에 가도 모자란 것보다 넘치는 게 차라리 기분 덜 상한다.

진한 카페인이 간절해 들어간 커피숍에서 내온 아메리카노에 크레마의 흔적도 없이 그저 까만색 물이면 십중팔구 영혼 없는 커피라는 이름의 쓴 물이다.

미슐랭도 아닌 그냥 동네 파스타 가게에서 내온 파스타 한 그릇에 담긴 음식이 보기에는 그럴싸한데 두세 번 휘저어 감아먹으면 없어져 버리면 맛이 있어도 두 번은 안 가게 된다.

남기는 것은 너무나 싫지만 부족해서 함께 식사를 하는 사람과 눈치게임을 하는 건 더 싫다.


조심스레 티팟의 뚜껑을 닫고 예쁜 찻잔을 꺼내어 쟁반에 내어가 여자가 있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브런치 작가 출신인 사장님의 비치용 책들은 주로 브런치 작가들이 낸 책들이었다.

그래서 눈에 익고 손이 쉽게 가는 호기심 자극하는 제목들의 책들이 많았다.

그중 한 권을 꺼내어 책이 꺾이지 않게 두 손으로 읽고 있던 여자는 나의 인기척을 느끼자 읽고 있던 책을 거꾸로 두고 책을 잡고 있던 두 손으로 쟁반을 건네받았다.


“감사합니다”

“혹시 차가 너무 진한 것 같으면 얘기해주세요. 따뜻한 물을 더 넣어드릴게요”


여자는 말없이 진한 주황색으로 물들여진 차를 잔에 따르더니 엄지와 검지로 찬잔 고리를 들어 천천히 음미하듯 차를 마셨다.

그 모습을 카운터 뒤에서 몰래 지켜보던 나는 여자의 표정 변화가 어떤지 마스크를 벗은 그녀의 입가를 보았다.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은 뒤 다시 마스크를 쓴 여자는 내 쪽을 보더니 만족스런 눈빛을 하며 말했다.


“딱 좋은데요! 맛있어요.”


홍차 한 잔 팔면서 이토록 가슴 졸일 일인가!

하면서도 드문드문 방문하는 손님들의 재방문을 위해서는 첫 방문 때 가장 좋은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이곳에서 내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기억하고 발길을 돌려 이 공간을 다시 찾아올 수 있게 하는 힘.

그것은 다름 아닌 좋은 기억이다.


책을 읽는 데 방해받지 않을 만큼의 볼륨으로 공간 사이를 파고드는 음악을 흘려보내고 함께 책 읽고 있다는 조용함으로 시끄러운 마음을 달래고 갈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을 일이 없겠다.

비록 오전에 잠깐 와서 책방을 지키는 알바생이지만 마인드는 주인이므로…


2022.9. 8 엄기.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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