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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기언 Sep 18. 2022

여긴 뭐하는 곳이에요?

마흔셋, 책방 알바생입니다만,

여긴 뭐하는 곳이에요?

토요일 오전 책방을 오픈하기로 한 첫날 ,

11시쯤 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밤새 더위와 사투하다 목숨을 바닥에 반납한 날파리들을 쓰레받기로 주워 담고 있었다.

하얀 바닥에 까만 깨 같은 날파리들은 화분이 많이 있는 곳에 더 많이 깔려 있어서 내 키보다 더 큰 파키라라는 이름의 대형화분을 낑낑거리며 살짝 이동시켜 주변을 정리한 다음 다시 또 낑낑거리며 제자리에 놓았다.

생각해보면 내 집에서는 힘쓰는 일이나 귀찮은 것은 눈에 보일 때마다 뒤로 미루는데 책방에서는 그때그때 해치워야 마음이 놓인다.


허리를 굽히고 무거운 것을 옮긴 만성 디스크 환자인지라 잠시 소파에 앉아 호흡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열어둔 문 밖에서 서너 살 꼬맹이가 꺄~~ 소리를 지르며 점점 이쪽 복도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뒤로 아이를 잡으러 쫓아오는 아빠의 굵직한 발소리가 귀에 살짝 거슬려 뒤를 돌아봤다.

그 순간 마주친 아이 아빠와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되받아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목례를 했다.

결혼 전이라면 꿈도 꿀 수 없는 행동이다.

눈이 마주치는 남녀노소는 타인이라면 응당 내쪽에서 먼저 시선을 거두든지 아니면 못 본 척했었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 애엄마가 되고 특히나 영업을 하는 책방 안에서의 나는 마주치는 시선 모두가 ‘잠재적 고객’이기에 애써 자연스러운 분위기로 이끌어가려고 하는 편이다.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의 겨드랑이에 손을 끼워 번쩍 들고서는 넓은 품 안에 안고서 다시 가려다 뒷걸음치더니 책방 문 앞에 서서 남자는 내게 여기가 뭐하는 곳이냐고 물었다.

버젓이 “동네책방”이라는 간판이 머리 위에서 하얀 LED 빛을 발사하며 공간의 정체를 설명해 주고 있었으나 남자는 정말 아리송하다는 눈빛으로 내 대답을 기다리며 공간을 두리번두리번 훑어보기 시작했다.


“여긴 작은 독립서점 같은 곳이에요. 들어와서 보셔도 돼요”


“아… 애가 있어서 그런데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그럼요! 아이들을 위한 책들도 많이 있고요, 저 안쪽에는 그냥 볼 수 있는 비치용 동화책도 많이 있어요”


남자는 잠시 망설이는 듯 아이 얼굴을 한 번 보더니 호기심 넘치는 아이의 몸이 이미 반쯤 책방에 넘어와 있는 것을 보고는 이내 아이를 바닥에 내려놓고 함께 들어왔다.

바닥에 발이 닿은 서너 살 남자아이는 아직 완전한 사람이라기엔 호기심과 체력의 임계치가 일반 사람의 것을 훨씬 넘어선다. 그래서 아직은 ‘반인반수’로서 어른들의 보살핌이 필요한 나이다.

두발로 걷기 시작한 이상 아이들은 허리 너머 눈높이 이상의 것을 탐구할 권리가 있으며 자유의지를 가지고 목표물을 향해 한 발짝 한 발짝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아직은 두발과 두 손이 뇌의 통제를 완전히 받는다고는 어렵기 때문에 손이 닿는 곳에 날카로운 것을 두거나 뜨거운 것 혹은 깨지기 쉬운 것을 치워두는 것도 어른들의 몫이다.


책방에 들어선 아이는 밖에서 꺆꺅거리며 돌고래 소리를 내던 것과 달리 까만 눈을 깜빡거리며 아빠 무릎까지 온 반바지 자락을 잡고 한 손은 낯선 공간의 긴장감 때문인지 엄지손가락을 찾아 빨고 있었다.


“옆에 미술학원에 오셨나 보네요?!”


“아… 예.. 얘 누나가 지금 수업 중인데 아이가 워낙 답답해해서 데리고 나왔다가 여기까지 왔네요.”


우리 책방 옆 옆집은 영어로 미술을 가르치는 학원인데 겉에서 봐도 뭔가 영유아 대상으로 아기자기하고 깔끔한 인테리어로 신도시 전업맘들의 눈길을 잡아끌기에 충분했다. 거기에 집에서 해주기 어려운 미술놀이를 무려 젊은 여자 선생님들이 싱글싱글 웃어가며 영어로 수업을 한다니 이게 바로 ‘일타쌍피’ 아닌가?


친구 중 하나가 고3 때 첫 수능을 보고 나더니 서울 안에서는 갈 학교가 없을 것 같다며 바로 엄마손에 이끌려 미국 유학상담을 받고 다음 달 출국했었다.

영어 듣기 평가 10문제도 겨우 반타작하는 막귀를 가지고 미국 고등학교에서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하고 안부를 물었더니 친구는 대답 대신  장의 사진을 보내왔다.

어깨를 다 드러낸 드레스를 입고 눈에는 무슨 화장을 한 건지 브리트니 스피어스 같은 여자애들 세명과 나란히 어깨와 허리를 감싸고 활짝 웃고 있는 사진.

아! 말이 안 통해도 십 대 소녀들끼리 공감할 수 있는 액세서리, 패션, 뷰티 기술을 보유한 자라면 이 세상 여자들이 있는 곳 어디서든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름을 수천번 말해줘도 까먹는 대학을 졸업하고 친구는 곧장 한국으로 와 부모님이 강남에 차려준 스튜디오를 발판 삼아 작은 사업을 시작하였다.

유치원생들에게 영어로 미술을 가르치는 비즈니스는 강남엄마들 사이에서 꽤 괜찮은 예체능 거리로 여겨졌다. 주말에는 꼬맹이들 몇 명 데리고 예술의 전당에 가서 직접 전시회 구경도 시켜주는데 영어로 아이들에게 샬라 샬라 설명할 때 가장 열심히 듣는 이는 다름 아닌 근처에서 전시회 관람 중이던 학부형들이었다.

전시 관람을 마치고 아이들을 데리고 분수쇼를 보여주며 쉬고 있으면 저만치서 엄마들 몇 명이 다가와 그룹레슨을 할 수 있느냐며 연락처를 받아가곤 했다.

사실 원생들을 데리고 전시회 오는 것은 꽤 귀찮고 힘든 작업이지만 가장 확실한 홍보수단이 되기도 했다.




“여기서 책을 보는 거예요? 아님…?”


“아, 여기 앞쪽에 진열된 책들은 판매용이구요, 테이블 안쪽에 비치된 책들은 자유롭게 볼 수 있구요”


“흠….”


동네에서 오며 가며 산책하다 볼 수 있는 전형적인 30대 중반으로 추정되는 남자의 외모는 대략 이러하다.

키는 178 정도에 간헐적으로 운동을 하는 것인지 아주 흐물거리지도 그렇다고 다부진 체격이라기보다는 적당히 보기 좋은 몸매, 피부는 노랑에 가까운 흰색이고 팔에는 털이 없는데 겨자색 무릎길이의 방수 재질 반바지 아래로 보이는 다리엔 드문드문 까만색 털이 있다. 흰 발목양말이 살짝 보이게 나이키 코르테즈를 착용하고 흰색 라운드 반팔은 루즈하게 흘러내려 박시한 스타일이다.

앞 쪽엔 아무 무늬 없지만 등판은 의외로 추상적이고도 컬러풀한 그림이 프린팅 된 티셔츠에 어울리는 파란색 야구모자가 남자를 더 어리게 추정시킨다.


남자는 한눈에 책장의 책들을 훑어본 뒤 몇 발자국 움직여 로버트 기요사키의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 가 진열된 책장 앞에서 잠시 아이의 손을 놓더니 낮은 책장에 꽂힌 부를 이루는 방법과 인플레이션에 대처하는 방법들을 가르쳐 줄 것 같은 책들의 향연 앞에서 경건하게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는 야구 모자챙을 이마 위로 조금 올리며 더욱 책장 가까이 몸을 숙였다.


그 사이 아이는 두 손과 두발이 자유로워진 틈을 타 반대쪽 책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아이의 뒤를 따라다니며 행여 넘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눈빛으로 아이를 보면서도 남자의 움직임에 신경이 쓰였다.

남자는 아예 한쪽 무릎을 꿇고 한쪽 무릎은 바치고 선반에서 책 한 권을 빼내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아이는 테이블이 있는 곳까지 걸어오더니 한쪽 귀퉁이에 진열해 놓은 비치용 책 표지를 보고는 환히 웃으며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뒤돌아 내게 말했다.


“아쁠! 아뿔”


‘사과가 쿵!’이라는 일본 동화작가의 비치용 책을 본 아이는 아는 책을 만난 건지 아는 그림에 맞는 영어 단어를 뽐내고 싶은 건지 연신 ‘아뿔 아뿔’을 외쳤다.


“아이고~ 영어도 잘하네! 이 책 본 적 있오?!”


내 아이가 신생아 시절부터 말을 하기 시작하고 단어를 읽을 줄 알 때까지 ‘사과가 쿵’이라는 책을 몇 만 번쯤은 읽어주었을 것이다.

아이가 혼자 앉을 수 있을 때는 내 가랑이 사이에 아이를 앉히고 책을 읽어주며 “사과가!”하면 아이가 큰소리로 “쿠웅!”하는 식으로 읽곤 했었다.

그때 그렇게 내 품 안에 쏘옥 들어와 앉아 온갖 귀여운 짓을 하던 내 귀요미 아들은 이제 사춘기 십 대 소년의 문턱에 들어서고 있다.


“응! 엄마가!”


그렇구나, 아이에게는 잠들기 전 책을 읽어주는 엄마가 있을 테지. 남자는 주말에 일을 하는 아내를 두었거나 주말 아침을 홀로 집안일을 하며 쉬고 있을 아내를 대신해 두 아이를 데리고 학원에 온 스윗한 남편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20대 때 잠시 캐나다에서 공부할 때였다.

홈스테이 가족은 나 그리고 나보다 여덟 살 많은 간호사 헤더, 그리고 그녀의 3살 난 딸 소피아가 전부였다. 임신을 하자마자 남친과 헤어져 캐나다 동부에서 서부 끝으로 이주한 후 홀로 딸을 키우며 남는 방을 홈스테이로 운영 중인 헤더는 누구보다도 씩씩하고 책임감 있는 가장의 모습으로 단촐한 가족을 만들어냈다.

주말에 셋이 공원을 산책하다 만난 놀이터에서 어김없이 소피아는 미끄럼틀을 향해 달려가 놀았다.

나와 헤더는 그런 소피아를 먼발치서 바라보곤 했는데 그때마다 내 눈에 띄는 건 엄마 없이 아빠와 노는 아이들이었다.

아니, 어떤 날은 우리 소피아만 엄마와 함께 온 아이였다. 놀이터에 온 아이들은 거의 다 아빠 손을 잡고 오거나 아빠가 밀어주는 유모차를 타고 온 아이들이었다.


‘이 동네는 홀애비들이 왜 이렇게 많나?’

저렇게 젊고 잘생긴 남자가 벌써 혼자 애를 키우네


혼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소피아가 미끄럼틀에서 놀다가 다가와 말했다.


“나도 아빠가 필요해!”




세월이 지난 후에야 알았다.

그들은 잘생긴 홀애비가 아니라 다정한 가정의 가장이자 남편이자 아빠라는 사실을.

꼼짝 않고 책장을 하나하나 넘겨보고 있는 저 남자도 이십 대 때 나의 눈으로 봤으면 꼼짝없이 홀애비로 판단 내렸을 텐데 이제는 그저 가정적인 남편이자 아빠 중 하나로 보인다.


책방 한가운데 놓인 소파로 갑자기 방향을 틀던 아이가 신발을 신은 채로 올라타려 했다.

화이트에 가까운 그레이 색상의 신상 소파를 사장님은 이벤트가로 아주 합리적인 가격에 샀다며 가격과 디자인 그리고 품질에 매우 만족해하셨다.

3인용이지만 네다섯이 앉아도 여유 있을 만큼 크게 나온 소파는 우리 책방의 한가운데에 떡하니 자리 잡아 통창으로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자태를 유감없이 뽐내고 있는 중이다.


“어어! 안돼요! 함부로 소파에 올라가면!”


벌써 내 몸도 소파 근처에서 아이의 발이 움직이는 것에 맞춰 슬금슬금 다가가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책을 보는 줄 알았던 아이의 아빠는 아이가 저지레를 치는 것에 민감한 듯 얼른 책을 덮고 일어나 아이에게 다가와 한번에 안아 올렸다.


“아빠! 가! 가!”


아이는 아빠 어깨너머 출입문을 오동통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나가자는 듯 발버둥을 쳤다.

남자는 그런 아이를 능숙하게 두 팔로 더 세게 안고는 다시 한번 안쪽 테이블과 소파들 그리고 통창 너머 풍경을 쓱 둘러보곤 말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그냥 가봐야 할 것 같네요. 다음에 애엄마랑 다시 올게요!”


“네, 마실 것도 판매 중이니 언제든 오셔서 책 보고 가세요. 여기 저희 책방 명함입니다”


아이를 안은 채 한 손으로 명함을 받아 든 남자는 미안한 표정과 함께 서둘러 출입문쪽으로 성큼성큼 나갔다.

시야에서 남자와 아이가 사라지는 걸 확인하고 아이가 많이 봤다는 사과그림책을 살포시 집어 들었다.

한 장 한 장 넘기며 내 아이에게 읽어주던 새벽녘 조명과 꼼지락거리며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책장을 넘기는 엄마의 손가락을 향해 팔을 뻗던 그 순간들이 아련히 지나갔다.

잠시 가슴 한켠이 진동벨 울린 듯 저려오더니 눈물이 차오르는 걸 느끼며 책장을 덮었다.

오늘 아침에도 웃음기 없는 짜증 난 얼굴로 서둘러 등교 준비를 하지 않는 아이에게 잔소리를 해대고 나가는 문에서까지 한 번의 미소를 건네주지 못한 못난 엄마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나인데…

아이는 고맙게도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침마다 엄마에게 혼났던 일이나 잔소리 폭격을 다 잊어버린 듯 내가 두 팔 벌려 마중하면 씨익 환하게 웃으며 “엄마~”하며 품 안에 안겨준다.


아직 늦지 않았다.

내 아이를 세상에서 나보다 더 소중한 존재로 여기며 내가 잠을 못 자더라도 아이의 편안함이 먼저였던 그때의 엄마는 화가 난 얼굴보다는 아이가 응가를 하는 모습에도 환희에 찬 얼굴로 잘한다잘한다를 연신 외치며 웃던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


집에 가면 어딘가에 버리지 않고 꽂혀있을 사과 책을 찾아 눈에 잘 보이는 곳에 두고 오며 가며 볼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2022.9.17 엄기.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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