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크리스마스를 좋아하게 된 데에는 어렸을 적 엄마 아빠의 노력에 그 이유가 있기도 했다. 크리스마스이브가 되면 엄마 아빠는 동생과 내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는 선물을 사러 나갔다. 모든 아이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크리스마스 날의 산타클로스 대역을 위해 엄마 아빠는 최선을 다했다. 아직은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들의 동심을 지켜주는 것도 부모의 역할이었으리라. 엄마 아빠는 당시 우리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샀다. 소소하게는 잔디 인형, 그림책, 퍼즐, 크레파스와 스케치북. 크게는 전자피아노가 기억에 남는다.
때는 7살.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직전의 어느 날이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나는 아빠에게 산타클로스에 대해 집요하게 물었다. 왜 빨간색 옷만 입는 건지, 몸은 얼마나 큰 지 등 그 나이대 아이들이 물어볼 법한 엉뚱한 질문들을 했다. 아빠는 어느 정도 대답을 해주다가 지쳤는지, 그렇게 궁금하면 114에 전화해서 산타할아버지의 주소와 연락처를 물어보라고 했다. 아빠는 순간 당신의 재치에 감탄하기라도 한 듯 아주 크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칠 줄 모르는 딸의 질문 공세에 맞서는 아빠 나름의 탈출구이자 딸의 귀여운 행동까지 볼 수 있는 신박한 방법이었다.
수줍음이 많던 어린 나는 싫다고 했다.
“아 싫어어어~ 아빠가 말해줘어어어~”
결국 나는 아빠의 반강제적인 제안과 엄마의 호응을 꺾을 수 없었다.
“여보세요. 산타할아버지 전화번호 좀 알려주세요. 아빠가 전화하면 알 수 있대요......”
당황스러웠을 내 물음에, 상담원은 차분히 응대해주었다.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상담원은 당황하지 않고 어린 내가 납득할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대답해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빠는 내가 귀여워 죽겠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며 크하하하하하하하- 크게 웃었고 온 가족이 깔깔댔다. 그 웃음소리는 마치 '화목한 가정'의 좋은 표본같기도 했다. 내가 주인공이 된 것만 같았던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20년도 훌쩍 지난 오늘날에도 크리스마스 때만 다가오면 아빠는 그때 이야기를 꺼낸다.
네가 어렸을 때 114에 전화했던 거 기억하니? 그때 얼마나 귀여웠다고!
고백하자면 나는 그때 다 알고 있었다. 산타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매년 크리스마스이브 밤이 되면 엄마 아빠가 우리를 재워놓고 몰래 나가 선물을 사 와서는, 동생과 내 머리맡에 살포시 선물을 놓고 나가고는 했었다는 걸 말이다.
나는 엄마 아빠가 선물을 사러 나가는 소리는 듣지 못했어도, 외출하고 돌아온 엄마 아빠의 작은 인기척 소리에 깨서 실눈을 뜨고 상황을 파악하곤 했다. 그리고 새벽같이 일어나서 외쳤다.
산타가 왔나 봐!!!!!! 우와!!!!!!!!!!
나는 그런 아이였다. 부모가 기뻐하는 모습에 집중했다. 당장의 내 알고 모름에 솔직하기보다 부모의 기분을 먼저 살폈다. 엄마 아빠가 환한 미소를 짓고 좋아해 주는 일이라면 때로는 내가 알던 것도 모르는 것인 양 기꺼이 ‘척’할 수 있었다.
재밌게도,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고 나니 어렸을 적 내 모습이 보인다. ‘어린 나’와 ‘지금의 나’. 두 자아가 있지만 하나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느낌이랄까. 30대에 접어든 지금의 내가 어린 나를 가만히 바라본다. 잠자코 그 속내를 들여다본다. 그리고 말한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지. 114에 전화해도 산타의 전화번호는 알 수 없는 것 아니냐고. 산타는 없는 것 아니냐고. 다 알고 있다고. 네가 생각하던 것을 속 시원하게 말해버리고 실컷 어리광 부리지. 그냥 투정 부려버리지.
그러다가 한편으로 또 생각한다.
그렇게 투정 부려도 받아줄 사람이 없던 것을 어린 나는 이미 알고 있던 것이 아닐까? 그렇게 말해버리면 엄마 아빠가 늘 강조하던 ‘동생에게 본보기 보여야 한다’는 모습과 거리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 아닐까? 속내를 이야기해버리고 나면 더 이상 선물을 못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까?
어른의 눈보다 예리하고 아는 것이 많았던 일곱 살. 어리지만 마냥 어리지만은 않고 키가 작다고 마냥 작지만도 않았던 그 나이. "아이다움"이란 무엇일까? 사전적으로 나와있는 표현은 아니지만 우리는 지레짐작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그 어떤 역할(첫째 아이 혹은 둘째 아이)이나 환경에 영향받지 않고 아이 그 자체의 색깔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 이런 것이 아이다움이라면, 나는 최대한 딸의 아이다움을 지켜주고 싶다.
'어린 나'의 모습에 어린 딸을 가만히 대입해 보는 일. 엄마가 되고 나서 생긴 새로운 습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