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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니 Dec 14. 2020

산과 나

융통성과 유연성의 상관관계

"너는 융통성이 없어. 왜 그렇게 가만히만 있는 거야.

 무슨 말이라도 해봐. 응?"


10대의 내 머릿속, 유난히 나를 찌르던 말이었다. 엄마는 "야무지다"고 생각하던 주변의 또래 아이들에 비해서 나의 부족함이 도드라져 보였을 것이다. 융통성이 없다고 나를 다그치는 엄마의 말을 들을 때면, 나는 속에서 억울한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와서 끅끅거렸다. 두 눈에 눈물이 찰랑찰랑 차 올라서 테이블 위 유리에 툭툭 떨어지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나는 눈물의 파편만 노려보며 입술을 깨물 뿐이었다. 엄마와의 논쟁에서는 내가 늘 지는 사람이었고, "죄송해요"로 상황이 마무리되곤 했다. 억울하고 답답한 감정이 가득했지만 나는 구체적으로 그 감정이 어떤 것인지 말로 풀어 설명할 자신이 없었고, 결정적으로 그 융통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





[융통성]

"그때그때의 사정과 형편을 보아 일을 처리하는 재주. 또는 일의 형편에 따라 적절하게 처리하는 재주."
(표준국어대사전)


삶에는 꼭 예기치 못하는 순간들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삶은 내가 공부한 대로, 내가 들었던 대로, 내가 상상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삶에 어떤 변화가 생겼을 때 그 변화에 맞게 내가 알고 있던 것을 변형해서 일을 해결해나가는 것이 삶의 지혜이고, 그것이 누구나 바라는 모습일 것이다.


엄마의 관점에서 보면 나는 답답한 아이였다. 생각이 많고 신중했던 나는 엄마의 바람대로 빠릿빠릿하고 영민한 아이와는 확실히 거리가 있었다. 나는 내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 어려웠다. 늘 타인에게 친절해야 하고 양보와 배려가 가장 좋은 미덕인 것으로 가르침 받았던 나는, 내 기분을 헤아리기 전에 상대의 기분을 먼저 생각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내 이야기를 전하는 것보다 상대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는 것에 더 익숙해졌다.


상대방의 의중을 잘 모르겠을 때는 입을 열지 못했다. 일단 그 말이 어떤 의미일지 생각하는 시간과, 시간이 지나 그제야 의미가 와 닿으면 어떻게 이야기할지 단어를 고르고 표현을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엄마는 그런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엄마는 상대의 오해를 살지언정 즉각의 피드백이 중요한 사람이었다. 나의 신중함과 조심스러움은 엄마에게 답답함과 융통성 없음으로 해석됐다.  


융통성에 대해서 한참을 생각하다가 남편에게 물었다.

"융통성이 어떤 건지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 있어?"


남편은 주저 없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사람들은 융통성에 대해서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 융통성이라는 건, 불의의 상황에 여러 가지를 사전에 대비해서 어떤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바로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야. 사전에 대비하고 충분히 생각하는 시간이 있어야 올바른 대처를 할 수 있잖아.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과정 없이 어떤 상황에서 대처를 잘하느냐, 못하느냐만 놓고 판가름하는데, 그건 잘못된 것 같아."


"그럼 나는 융통성 있는 사람 같아, 없는 사람 같아?"


"자기는 사전 대비를 최대한 꼼꼼히 하려고 하고 신중하잖아. 어떤 행동을 해야 할 때 충분히 고민을 많이 하고 그에 맞는 행동을 하잖아. 그런 의미에서 자기는 완. 전. 융통성 있는 사람이지."


내가 융통성 있는 사람이라고?  입이 떡 벌어졌다. 한 사람을 두고, 한 개념을 두고 이렇게나 다를 수 있는 두 사람의 시각 차이가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나는 가끔씩 산을 생각하면서, 산은 과연 융통성이 있는 존재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떠올려보고는 했다. 산은 저 자리에 언제까지나 우뚝 서 있는 존재인데, 그 무엇으로도 끄떡 않는 산이 융통성면에서는 과연 어떨까.


산은 변명이 없다. 그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땅과 흙을, 나무를, 산에 사는 곤충과 동물들을, 사람들을 조용하고 묵묵히 품을 뿐이다. 산은 움직이지 않는다. 눈이 오면 눈이 오는 대로, 태풍이 오면 태풍이 오는 대로, 여름의 장대비가 난데없이 쏟아져도 온 몸으로 받아낼 뿐이다. 이 쯤되면 피할 법도 한데 산은 비켜서거나 달아나는 법이 없다. 오히려 그 자리에 더욱더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자신의 자리를 굳히기로 마음먹는다. 산이라고 춥지 않은 것이 아닐 것이다. 산이라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장마가 늘 달갑지는 않을 것이다. 산이라고 외롭지 않은 것이 아니고 산이라고 울고 싶은 날이 없는 것이 아닐 것이다.


산에서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평등하다. 남자와 여자의 구분도 없고, 늙음과 젊음의 경계도 모호하다. 누가 더 짙은 색을 띠는지 옅은 색을 띠는지, 누구의 목소리가 더 세고 약한 지도 중요하지 않다. 그저 모두가 숲의 일원으로서 존재할뿐 누구도 다르지 않다.


산은 그저 분별없이 모두를 품으려는 존재이다. 산에게는 자신의 존재감을 내세우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게 아니라 얼마나 상대와 조화롭게 섞일 수 있는지가 가장 중요한 것도 같다. 산은 포용과 사랑을 위해 그 누구보다 세심하게 애쓰는 존재가 아닐까, 아무런 말없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산은 융통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구보다 융통성 있는 존재인 것은 아닐까. 모든 것을 아우르고 품으며 끝내 가장 조화로운 모습을 세상에 내보이는 존재 말이다.


세상에 휘둘리지 않는 나만의 기준을 가지고, 하지만 자만하거나 우월감 없이, 앞으로 다가올 일들에 유연히 결정 내릴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삶이 내 마음 같지 않다고 느껴지거나 머릿속이 유난히 복잡해지는 때가 오면 산을 떠올려야겠다. 제 자리에서 조용히 자신의 일을 하는 산. 과묵하고 움직임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그 어떤 존재보다 유연하고 사랑이 충만한 산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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