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해보고자 하는 마음은 너무 쉽게 공격받는다. 순수하게 '잘해보고 싶다'는 사실만 떠올리며 앞으로 나가면 될 것을, 이 마음을 먹고 나면 꼭 '내가 잘할 수 없을 경우'에 대해 온갖 이유를 갖다 대며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는 내가 보인다. 시작도 하기 전에 맥이 풀려 버린다. 불과 몇 분 전에 마음먹은 그 비장한 다짐은 어디로 도망가 버린 것일까. 지금 이 순간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그토록 쓰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었나. 복잡한 생각들은 다 걷어내고, 차분히 이 순간에 집중해본다.
<나는 왜 글을 쓰고 싶은 걸까> 생각해 보았다. 10대 때는 여느 또래 여자 아이들이 그랬듯 손편지로 속마음 건네기를 좋아하는 아이였고, 20대로 접어들면서는 여유 시간이 생기면 자주 무언가 끄적거렸다. 잘 써지지 않을 때는 책에서 좋았던 구절들을 모아놓은 메모장을 한 번씩 꺼내 읽으면서 위로받았다. 그게 다였다. 꾸준히 글을 쓴 적도, 이렇다 할 글을 써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 시키지 않고 내가 자발적으로 무언가를 꾸준히 한다는 것은, 적어도 그 분야에 애정이 있다는 것이겠지. 애정 없이 지속 가능한 것은 없다. 잘하고 잘 못하고를 떠나서, 나는 한결같이 '쓰고자'하는 사람이었다.
아이를 낳고 글을 쓰고 싶은 욕구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내 몸 아픈 것은 다 제쳐두고, 하루 종일 아기와 생활하던 나는 아기가 잠들고 고요한 밤이 되면 쓰고 싶은 욕구가 강해졌다. 어떤 날은 아기의 발달 과정을 적어 내려가기도 하고, 어떤 날은 내가 느낀 한계점 같은 것들을 쓰기도 했다. 수면량이 턱없이 부족했던 나는, 아기가 잠들면 같이 곯아떨어져도 부족할 판에 꾸역꾸역 그 날을 기록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왜 나는 그 극한 피로 속에서 쉼보다 무엇인가를 쓰고자 했던 것일까?
매 순간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의 매일을 최대한 많이 기억하고 싶은 이유가 컸다. 순간을 영원히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기록해 놓지 않으면 잊혀가는 일들이 많았다. 엄마가 된 나는 기억하고 싶은 추억들이 너무 많이 생겨버렸고, 이는 자연스레 기록하는 일로 이어졌다. 쓰는 행위만이 유일하게 시간을 잡아둘 수 있는 방법이었다.
내가 쓰는 이유에는 나를 알아가고자 하는 노력도 있다. 나는 20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어떤 순간이 불편하고 어떤 순간에 행복한 사람인지 알지 못했다. 심지어는 내가 그것들을 모른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내가 써놓은 문장들에서 나는 내가 가장 또렷하게 보였고, 그렇게 점차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게 되면서 (지금도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고) 그 어떤 때보다 따뜻한 위로를 받았다. 글을 쓰는 것은 나를 알아가는 것과 더불어 나를 사랑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기도 했다.
글 쓰는 모든 사람들을 동경하고 때로는 질투할 수 있되 그로 인해 괜히 겁먹지 않기로 한다. 잘 쓰는 사람들의 글을 읽으며 위축되지 말고, 그저 좋은 글을 접할 수 있음에 감사하면서, 나는 내 이야기를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