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고 있었다.
방에 크게 나 있는 창문을 반 정도 열었다. 비가 온다라는 말보다 하늘에서 물을 퍼붓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았다.
방충망 사이로 비가 들이쳐 팔 위를 톡톡톡 내리쳤다.
방 안으로 튀어 들어오는 빗방울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그런 거야 닦으면 그만이지 뭐 싶은 마음에 창문을 완전히 열어젖혔다.
작은 원룸이었지만 혼자만의 공간이 생겼음에 매일 밤 ‘아, 이런 평온함을 원했던 거야.’ 만족스러운 마음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창문 밖 모습은 갈색 벽돌로 무장한 앞 건물 빌라에 사는(어쩌면 나와 처지가 비슷한) 어떤 사람 집의 꽃무늬 커튼뿐이었고 비에 진득이 젖은 아스팔트 냄새뿐이었다.
방 창문을 열자마자 계절에 맞는 나무들의 변화와 비를 흠뻑 머금은 나뭇잎들의 향이 그리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띵’
메시지가 울렸다. 까만 액정 화면에 반짝하고 사라진 이름에서 L의 이름이 보였다.
평소 메시지를 받더라도 하루 종일 모아 두고 담아뒀다 잠자리에 들기 전 차례대로 답장을 하는 나였지만, L의 메시지만큼은 묵혀 두고 볼 수 없었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약자라는 고루하고도 당연한 원칙에서 나만 예외일리는 없었다.
‘비가 많이 와. 이런 비는 같이 보고 싶은데. 우리 집으로 와주면 좋겠어.’
L의 언어는 언제나 그랬다.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거절하고 싶은 마음조차 들 수 없도록, 나의 의사를 물어 권유하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명령에 가까운 말들.
퍼붓는 비를 보면서 창문을 열어젖혔던 건 L이 보고 싶어서이기도 했고, L과 함께 보는 비에 중독되어 버리고 만 습관 같은 거였다.
앞집 꽃무늬 커튼보다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다보이는 L의 창문 밖 풍경에 마음이 끌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응. 지금 가.’
L의 집 앞에 도착해 똑똑 현관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문을 열고 얼굴을 빼꼼히 내민 L은 내 손을 잡고 집 안으로 끌어당겼다. 현관에 들어서자 수건으로 옷에 묻은 물기를 털어주곤 만남의 처음과 끝에 빠지지 않는 머리를 스르륵 헝클어트렸다.
사실 아무 관심 없던 L에게 마음이 혹 빠진 것도 난데없이 내 머리를 헝클어트리곤 길고 얇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다시 만져주는 바람에 일어난 일이었다.
L의 집은 어수선했다. 아직 정리되지 못한 짐들이 박스와 바닥에 널브러져 이사를 오는 건지 가는 건지 도통 구분이 되지 않았다.
‘나 홍콩에 가고 싶어.’
‘여행 가고 싶으면 가면 되지. 그 말이 뭐가 그렇게 어려워.’
‘아니, 여행 말고 살려고.’
‘홍콩에? 갑자기? 왜? 아니 근데 왜 홍콩이고? 아니 왜 갑자기?’
갑작스럽게 밝힌 L의 홍콩행 의지에 적당한 반응을 찾지 못해 일부러 더 허둥지둥하며 대답했던 것이 벌써 3개월 전의 일이었다.
L이 내 곁을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L의 홍콩행에 나의 의사 따위가 끼어들 틈이 없다는 것쯤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대신 나는 L이 홍콩 회사로 이직하는 데 할 수 있는 최선의 도움을 주었다. 영어면접 예상 질문지를 함께 뽑고, 면접관이 되어 날카로운 질문을 쏟아붓기도 하고 화상으로 이루어지는 면접인 만큼 화면에 비치는 애티튜드에 관해서도 놓치지 않고 조언했다. 발표일 아침, 평소와 다르게 극도로 긴장하고 있는 L에게
‘난 이런 느낌이 대충 맞는데, 당장 홍콩으로 날아오라는 연락이 올 것 같아. 진짜야. 느낌이 그래.’ 같이 마음에도 없는 위로의 말을 건네기도 했다.
L에게는 다행이고 나에게는 조금 슬프게도 홍콩 회사에선 L과 함께 일해보자는 연락이 왔다.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행복에 취한 L에게 바늘 가득 돋친 한마디를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난 이번에도 나를 잔뜩 숨기고 L에게 ‘진짜 축하해’ 같은 또, 마음에도 없는 축하의 말을 건넸다.
L은 집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박스들을 대충 발로 밀어놓고는 한쪽 벽에 크게 나 있는 창 앞에 작은 테이블을 편 후 냉장고에서 맥주, 와인 그리고 간단한 안주거리들을 올려놓았다.
테이블이 세팅되는 사이 나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고층이어서인지 우리 집과는 다르게 빗물이 들이치지 않았고 빗줄기가 아스팔트 바닥을 치고 피어오르는 진득한 냄새도 나지 않았다.
눈 앞에선 빗금 같은 빗줄기가 슥슥슥슥 빠른 속도로 그어지고 집집마다 켜놓은 형광 불빛이 아물아물 피어올랐다.
한 여름이었지만 한기가 올랐고 마침 L이 얇은 담요를 내 한쪽 어깨에 걸치고 나머지 반쪽은 자기 어깨를 감쌌다.
“노래 불러줄까?”
“응. 비가 오니까.”
“그래. 비 오는 날엔 비 노래를 들려줘야지.”
흐흠. 살짝 목을 가다듬은 L은 작은 목소리로 심수봉의 비나리를 부르기 시작했다.
마지막일 것 같은 L의 노래.
마지막일 것 같은 비 오는 서울 밤의 풍경.
마지막일 것 같은 L의 살 냄새.
마지막일 것 같은 우리의 맥주.
L이 떠나버린 서울은, 여름은, 비 오는 여름밤은 한없이 슬퍼지게 될 것 같은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