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극장 앞 자판기(1)

PM 15:40

by 라일라

나는 알고 있었다. 그것도 분명하게.

사랑이란 거창한 이름을 붙이지 않더라도 아니 붙일 필요도 없이 내가 당신에게 빠져들 것을 알 수밖에 없었다.


P가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와 자리를 고르고 아주 조용한 걸음으로 맨 뒷자리로 가 조심히 의자를 빼고 앉아 단정하게 모자를 한번 쑥 눌러 매만지는 모습까지 내 눈은 P를 놓치지 않았다.


모두가 처음 보는 사람들, 시작의 설렘, 어색함에 눌려 다소 무겁게 내려앉은 찬 공기, 주변인을 최대한 의식하지 않으려는 듯한 긴장감이 우리 모두를 지배하고 있었다.

잠시 후 나이와 성별을 가늠할 수 없는 사람이 파일철 하나를 품에 안고 들어와 높고 좁은 강의 테이블 앞에 섰다.

살집이 있고 커트머리에 도수가 높아 보이는 안경을 쓰고 있어서인지 나이와 성별, 역할이 오리무중 할 뻔했지만 자신의 소개를 하면서 곧 조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교는 강의실을 한번 쑤욱 둘러보더니 입을 뗐다.

“다들 반갑습니다. 여러분이 듣게 될 시나리오 작법 입문반 조교를 맡은 ㅇㅇㅇ입니다. 아시다시피 3개월 과정입니다. 3개월 동안 매주 지지고 볶고 볼 사인데 서로 인사는 해야 하겠죠? 이제 한분씩 나오셔서 영화 같은 소개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종류의 기분은 아주 낯설었다.

대학을 졸업한 지 한참이나 지난 때였고 신입사원 때만큼의 패기도 사그라든 지 오래전이었으므로 기대에 찬 설렘 같은 감정이 아닌, ‘다들 어디서 뭐하다 왔을까?’ 같은 경계의 마음이었다.

내 앞에 앉은 사람들의 고개가 일제히 하지만 굉장히 자연스럽게 떨구어지는 것이 보였다. 선생님이 발표를 시키면 자동으로 고개가 처박아지는 건 모든 사람 몸에 탑재된 고정값 같았다.

“음, 이럴 줄 알았어요. 그럼 고정불변이죠 뭐. 출석부 순서대로 가겠습니다.”

그런데 영화 같은 소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글 쓰는 일을 즐겼고(좋아했고), 영화를 즐겼고(좋아했고) 그러면 시나리오를 써봐도 좋지 않을까 싶었고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기 전에 해보고 싶은 일은 질러봐야지 싶은 마음에 선배들의 눈치를 피해 야근까지 땡땡이치고 온 나를 어떻게 소개해야 하지?

다행히 내 이름의 가장 앞 자는 ‘ㅅ’이고 시간을 조금 벌 수 있었다.

나의 영화 같은 소개를 고민하느라 ㄱ,ㄴ,ㄷ,ㄹ,ㅁ의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소개를 모두 놓치고 있었다.

그러다 조교가 부른 이름에 단정하게 모자를 눌러쓴 P가 자리에서 일어나 강의 테이블 앞에 섰다.

P의 이름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P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이름과 나이, 좋아하는 영화를 짧게 소개하곤 ‘잘 부탁합니다.’ 인사를 꾸벅하고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영화 같은 소개를 고민하던 내 차례가 되었다. 나를 소개하는 일엔 언제나 떨림이 동반되었지만 최대한 의연하게 하지만 길어지지 않게 몇 가지 정보를 전달하고 소개를 마쳤다.

ㅇ,ㅈ,ㅊ으로 이어지는 사람들의 소개는 주의 깊게 들을 수 있었다. P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내 소개도 끝났으니 더는 긴장할 필요가 없었다.

ㅎ까지의 소개가 모두 끝났고 조교는 칠판에 대충 지도를 그린 뒤 ‘ㅇㅇ주유소 앞 ㅇㅇ호프 2층’이라고 크게 적었다. 뒤풀이가 마련되어 있으니 자리를 옮겨 긴장했던 마음을 풀고 서로를 알면 좋을 것이라는 말도 함께 전했다.

조금 이상한 일이긴 했다.

수업을 듣기 위해 왔는데 선생님은 보지도 못했고 강의계획 같은 것도 없고 서로 이름만 확인했을 뿐인데(이마저도 난 P의 이름밖에 기억하지 못하는데) 친해지는 자리를 갖자니.

술 마시기 위해 만난 사람들인가?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하나 둘 자리에서 짐을 챙겨 일어났다. 처음의 팽팽했던 긴장보다는 조금 느슨해진 분위기였다.

옆자리에 앉은 사람의 이름을 서로 다시 묻고 촌스러워 보이지만 친밀감을 높이는 데 가장 유용한 악수로 ‘반갑습니다.’ 같은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도 있었다.

내 옆자리에 앉은 언니는 작은 목소리로 ‘우리 같이 갈까요?’ 고마운 인사를 건네 왔다.


아직은 입김이 폴폴한 2월 마지막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