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 8:52
우리들은 대충 그려진 칠판의 약도를 보고 ‘ㅇㅇ 호프’를 찾아가는 듯했지만 강의실에서 가장 먼저 출발한 사람이 조교를 쫓아갔고 다음 무리들이 그 뒤를, 또 다음 무리들이 그 뒤를 쫓아가면서 마치 소풍 나온 유치원생들의 줄 맞춰 걷기 같은 풍경이 연출되었다.
옆자리에 앉았던 언니는 조곤조곤한 말투로 걷는 내내 이런저런 질문을 해왔는데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내 신경은 온통 P에게 가 있었고, P가 어디쯤에서 걷고 있는지 어떤 사람들과 섞여 있는지 아니, 뒤풀이를 가는지 아닌지 그의 발걸음을 쫓기 바빴다.
P는 무리의 끝에서 혼자 천천히 걷고 있었다. 걸음의 속도나 분위기가 누가 봐도 뒤풀이 장소로 향하는 것 같지 않아서 마음이 조급해졌다. 내 옆에서 조곤조곤 영화 같은 자기소개를 하고 있는 언니가 없다면 은근슬쩍 내 걸음을 늦춰 P의 옆에서 나란히 걷기라도 할 텐데, 심술이 솟았다.
P의 발걸음을 확인하느라 자꾸 돌아가는 목이 뻐근해질 때쯤 ㅇㅇ호프 2층에 도착했다.
ㅇㅇ호프는 어둡고 습하고 익숙했다. 큰 조명 없이 촌스러운 색깔들로 반짝반짝 불을 뿜고 있는 작은 전구들이 엮여있는 전기선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발을 들여놓자마자 ‘맡아지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쌓였을 술과 천소파 먼지의 습함. 충무로는 난생처음 오는 곳이고 이 곳을 알리 없는데 눈과 코에 진하게 밀려 들어오는 이 익숙함은 무엇이지? 고민할 때 맞다, 여긴 대학가이고 익숙함의 정체는 ‘우리 학교 앞, 강의실보다 더 오랜 시간 상주했던 ㅁㅁ호프’의 딱 그 모습이었다.
괜한 추억놀이에 빠져들 찰나 P가 생각났다. P는 어디 있지? 사람들이 좁은 공간에 모두 들어오지 못하고 계단에 반쯤 걸쳐져 있는 것이 보였다.
조교는 앞에서 차례로 사람들을 자리로 밀어 넣고 있었는데, 그 속도라면 곧 나도 앉혀질 테고 그럼 P와의 거리가 너무 멀어져 오늘 한마디라도 나눠보는 건 어려운 일이 될 것 같았다.
순간! 화장실이 떠올랐다.
‘그래 화장실에 다녀오자. 슬쩍 화장실에 다녀오면 내 차례도 뒤로 밀릴 테고 그땐 자리 끝에, P와 가까운 자리에 앉을 수 있겠지!’
스스로에게 감탄하면서 언제부터인지 내 팔짱을 꼭 끼고 있는 조곤조곤 언니에게
“언니 나 화장실 다녀올게요. 자리에 먼저 앉아요.”라고 말했더니
언니는
“아 나도 나도 화장실 화장실. 같이 가자!”라면서 조곤조곤 말투는 어디다 갖다 버리고는 그렇게 씩씩한 목소리로 조교에게 우리의 화장실행을 ‘보고’했다.
상관은 없었다. 언니와 함께여도 아직 계단에 걸려있는 P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와서 끝자리에 자연스럽게 앉으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이 짧은 순간에 이렇게 완벽한 계획을 세우다니! 감탄하고 있는 사이 조교는 예상치도 못한 답변을 내놓았다.
“아 그래요? 그럼 여기에 가방 놓고 다녀오세요.”
아, 잠깐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