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곤조곤 언니에게 끌려가다시피 화장실에 다녀왔고 자리로 돌아오니 가방이 다소곳이 놓인 채로 두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 와중에 사람들은 모두 자리를 잡고 앉았고 역시나 끝자리에 앉아있는 P를 발견하곤 조금의 안도감 같은 것이 돌았다.
잠시 후 덩치가 크고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쓴 중년의 남자가 마치 주인공이라도 된 듯 손을 흔들며 걸어 들어왔다.
‘누군데 저래?’ 싶었는데 허허허허 반가워요 여러분이라고 하는 말에서 우릴 지도할 선생님이겠구나 알 수 있었다.
테이블마다 맥주가 끊김 없이 리필되고 있었고 술기운 덕분인지 처음의 어색한 분위기는 금세 사라져 버렸다.
강의실에서의 영화 같은 소개보다 더 극적이고 생생한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다들 어디에서 뭘 하다 우리가 이제 만난 걸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서로의 이름과 나이를 묻고 답했지만 사실 대화를 트기 위한 도구였을 뿐 중요한 건 아니었다.
혼자 보고 혼자 기록하고 혼자 되뇌어 왔던 감상들을 나누고 궁금해하고 감탄하고 게다가 나만의 취향에서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세계의 이야기들을 듣는 시간에 정신이 몽롱해졌다.
앞, 옆, 그 옆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나의 눈은 가끔 혹은 자주 P를 향했다. P 역시 그의 앞, 옆, 그 옆사람들과 비슷한 내용의 주제 들로 대화를 나누는 듯 보였고 문득 궁금해졌다.
‘P의 영화는 어떤 것일까?’
조금씩 시간이 흐르자 사람들은 처음 앉았던 자리에서 그 옆으로 그 옆으로 마치 컨베이어 벨트 위 과자 봉지가 이동하듯 자리를 옮기고 있었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내가 오른쪽으로 조금씩 옮겨가고 P가 왼쪽으로 조금씩 옮겨오고 있었다.
그러다 드디어 마주하게 되었다. 내 앞의 P를.
가까이에서 마주한 P는 매서워 보였던 인상과는 다르게 웃을 때 반달이 되는 눈과 호탕한 웃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선택하는 단어들에서 신중함이 보였고 물어오는 질문들에 예의가 묻어 있었다.
P와의 대화는 짧았다. 나와 P가 마주 보고 앉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렸던 것 같은데 사람들의 움직이는 속도는 술잔이 늘어나는 만큼 빨라졌다.
내가 자리의 끝에 앉았을 무렵 풍채 좋은 선생님은 술잔을 들고 일어서더니 ‘어떻게든 파이팅!’을 외쳤다.
공식적인 술자리는 끝이지만 진짜는 이제부터라는 말과 함께.
시계를 보니 벌써 10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잠깐의 고민이 이어졌다.
충무로에서 집까지는 적어도 한 시간 반이 걸리고 내일 출근을 생각하면 지금 난 집으로 가는 무리에 섞여 들어야 하는 것이 맞았지만 집으로 가기는 싫었다.
P가 자리에 남아 있었으므로.
삼분의 일 정도로 줄어든 인원이 선생님의 뒤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입김이 폴폴 나는 한기가 돌았지만 어쩐지 춥진 않았다.
아주 오랜만에 들이킨 맥주와 목소리를 한껏 높여야만 대화 소리가 들리던 왁자지껄함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것 같았다.
저 앞에서 조곤조곤 언니가 나를 보며 빨리 오라고 손짓하는 것이 보였다.
그제야 취기가 오르는지 자꾸만 걸음이 느려졌다. 자리를 옮겨 술을 더 마셨다간 내일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불길함도 들었다.
P와 대화를 조금 더 나누고 싶은 마음도 흐릿해질 만큼. 가만, 그런데 P는 어디 간 거지?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괜찮아요?”
P였다. P가 어깨를 톡톡 두드리고선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심장이 내려앉는다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거구나 같은 생각이 스쳤다.
“아, 네. 괜찮아요.”
다음 말을 재빠르게 이어야 하는데 느려진 걸음만큼이나 생각도 굳어버린 듯했다.
“음, 괜찮으면 우리 술도 깰 겸 커피 한잔 마실까요?”
내 대답을 듣기 전에 P는 무리와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느려지고 천천해진 내 걸음은 언제 그랬냐는 듯 빠르게 P를 쫓았다.
P와 나는 별 다른 말 없이 대로변을 지나 대한극장 앞에 멈춰 섰다.
“여기 의자에 잠깐 앉아있을래요?” 하더니 P는 성큼 걸어가 불빛이 환한 자판기 앞에 서서 버튼을 누르고 캔커피 2개를 뽑아왔다.
옆자리에 P가 앉으며 캔커피 뚜껑을 따 건네 왔다.
P는 조금 갈라진 목소리를 가다듬으려 말했다.
“아직은 춥죠? 따뜻한 거 마시면 조금 괜찮아질 거예요.”
한 모금 마신 커피는 달고 따뜻했다.
평소에 단맛이 나는 커피를 전혀 마시지 않았지만 P가 주는 커피의 단맛엔 거부감이 들지 않는 것에 신기한 마음이 들었다.
사람들에 섞여 나눠지지 못한 대화들이 끝없이 이어졌고, P와 나의 영화, 음악, 시시콜콜함들이 뒤섞여 거리의 사람들과 도로 위 차들의 불빛이 뜸해졌다.
P와 나는 우리가 만나지 못했던 어제까지의 삶을 모두 꺼내 보이고 서로를 궁금해했다.
파랗게 날이 샐 때쯤 P는 내 손을 살짝 감싸 쥐었고 나 만큼이나 두근거리는 P의 심장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그의 들뜸이.
새벽녘의 파란 공기 냄새와 P의 남방에 베어 오는 꽃향기 비슷한 섬유유연제 향기가 코끝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부드럽고 뭉툭한 P의 손에서 따뜻한 땀이 났다.
그런 P의 손을 꼭 쥐며 나는, 생각했다.
‘우리의 아니 나의 깊이가 적당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