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자연이 아이들에게 가르쳐준 것들
하교 후 방과 후 수업이 없는 날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애월 해안도로로 향했다. 여행자 시절에도 여러 번 들렀던 익숙한 길. 전날 엄마 혼자 자전거를 타고 다녀온 것이 궁금하다며 아이들이 애월해안도로에
가자고 했다. 반가운 마음에 코코도 함께 데리고 나섰다. 아직도 하교 후 집 앞바다 보러 가는 게 낯설다.
오후 세 시의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푸르고 깊었다. 쨍하게 내리쬐는 햇살 아래 바다는 생각보다 거칠었고 파도는 방파제를 넘나들며 힘차게 부서졌다. 아이들은 마치 처음 바다를 본 듯 소리 지르며 환호했다. 젖은 신발도, 튄 바닷물도 그저 신나는 놀잇감일 뿐이었다.
제주로 이사 온 후, 아이들은 학원을 다니지 않는다. 대신 예체능 중심의 방과 후 수업만으로 하루를 채운다. 초등 4학년, 5학년이면 공부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는 걱정 섞인 말들을 자주 듣지만 나는 그보다 더 깊은 배움이 있다는 걸 믿는다.
자연은 아이들에게 참 많은 걸 준다.
거센 파도 앞에서도 해맑게 웃는 아이들을 보면 자연이 아이들의 마음을 다독이고 단단하게 만들어주고 있다는 걸 느낀다. 복잡한 감정으로 휘청일 때도 바람 한 줄기와 바닷소리 앞에서는 마음이 맑아진다. 아이들은 그 속에서 감정을 정리하고 스스로를 회복해 낸다.
무엇보다 자연은 매뉴얼이 없는 세상이다. 정답도 없고 틀릴까 걱정할 필요도 없다. 조약돌 하나, 물결무늬 하나에 상상을 덧붙이고 규칙 없는 놀이 속에서 아이들의 창의력이 자란다. 맨발로 흙을 밟으며 걷고 바람의 방향을 온몸으로 느끼고 파도의 리듬에 몸을 맡기며 감각이 확장되고 몸이 자연스럽게 성장한다.
아이들은 자연 속에서 작은 생명들을 바라보며 기다림을 배우고 조용히 귀 기울이며 공감하는 법도 익혀간다. 누군가를 배려하고, 나보다 느린 존재에 맞추어 함께 걷는 힘, 그건 교실에서 배울 수 없는 삶의 언어다.
그리고 이 모든 경험이 결국 나를 선택하는 힘으로 돌아온다. 무엇을 할지 스스로 정하고 그 선택의 책임을 지며 몰입하는 순간들. 자연은 아이들에게 자기 삶을 살아가는 연습장을 내어준다.
그래서 나는 믿는다.
학원보다, 시험보다 더 근본적인 힘이 이 바다와 숲과 바람 속에 있다는 것을.
제주는 아이들에게 자연을 돌려주었고 자연은 아이들에게 자신을 돌보는 법을 알려주고 있다.
파도를 기다리는 마음, 바람을 느끼는 감각, 흙을 만지는 손끝에서 아이들은 자신만의 삶을 천천히, 그러나 단단히 길러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