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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는 날엔 마음도 눅눅해진다.
밖에 나갈 수도 없고 방 안에만 있긴 아쉬운 날.
아이들 방과 후 수업 없는 목요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오전부터 고민했다.
아이들이 하교하기 전 비 오는 오후를 감성 있게
보내기 위한 공간을 하나 미리 골라두었다.
몇 번 눈여겨봤던 곳. 바로 집에서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 홀릭뮤지엄.
코코는 아쉽지만 함께할 수 없었다.
반려견은 입장할 수 없는 공간.
오랜만에 셋이서, 엄마와 아이들.
그 단출한 조합으로 시간을 채워보고 싶었다.
우산을 접고 전시장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우리가 걷던 하루와는 전혀 다른 온도가 우리를 맞이했다. 밖의 회색빛과는 다른 빛과 색,
그리고 상상이 반짝이는 실내였다.
아이들은 곧장 장미가 가득한 방에 들어가 숨을 들이쉬었다. “엄마, 여기 진짜 꽃으로 된 동굴 같아.”
그 말 한마디에 나는 오늘 이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노란 바나나가 주렁주렁 달린 방에선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깔깔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그 공간에 더 어울리는
조명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공간은
푸른 조명이 가득한 방이었다. 천장에서 흘러내리는 듯한 조형물들이 마치 바닷속 해파리처럼 흔들리고
그 빛은 공기까지 푸르게 물들였다.
아이들은 조용히 걸었다.
신기하다는 말도, 예쁘다는 말도 잠시 멈춘 채,
그 공간이 주는 고요함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둘째는 나지막이 말했다.
“엄마, 여기 바다 같아. 말 안 해도 좋은 느낌.”
그 말을 듣는 순간 이 공간이 왜 마음을 오래
붙잡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좋은 느낌.’ 말보다 더 정확한 표현이,
아이 입에서 나왔다.
우리는 천천히 하지만 지루할 틈 없이
공간을 걸었다. 두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게
전시의 끝에 다다랐고 아이들은 아쉽다는 듯
다시 뒤를 돌아봤다.
밖으로 나왔을 땐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우리 마음은 오히려 맑아져 있었다.
창밖의 회색은 그대로였지만
아이들 눈동자 속엔
붉은 장밋빛과 푸른 바다빛이 잔상처럼 번져 있었다.
돌아오는 길, 조수석에 앉은 첫째가 말했다.
“엄마, 우리 다음에도 비 오는 날에만 이런 데 가자.”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비 오는 날만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