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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는 한 시간 전의 하늘을 전혀 믿을 수 없는
섬이다. 햇살 가득한 아침을 맞이하고도 불과
몇 분 뒤에는 굵은 빗방울이 차창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그러다 다시 해가 반짝이며 금세 땅 위의 물기를 지워버리곤 한다. 날씨의 감정선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하다. 예측할 수 없음이 때로는 번거로움을 주기도 하지만 이곳에서의 하루하루는 마치 자연이
써 내려가는 시처럼 늘 새로운 장면을 선물 받는다.
금요일 오후, 아이들 하교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하늘은 점점 짙은 회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오래간만에 외식이라도 해볼까 했던 작은 계획은
쏟아지는 빗줄기에 맥없이 접혀버렸다. 바닥에 부딪히는 빗소리가 점점 굵어지는 걸 보며
결국 나는 혼자 장을 보러 나섰다. 비에 젖은
도로 위를 조심스레 달리던 그때 돌아오는
길목에서 뜻밖의 장면과 마주쳤다.
전신주 사이로 머리를 내민 무지개.
회색의 구름 사이를 꿰뚫고 나온 듯한 분명하고도 단정한 아치 하나가 하늘 위에 조용히 떠 있었다.
나는 본능처럼 차를 갓길에 잠시 멈추고 휴대전화를 꺼내 아이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얘들아, 지금 당장 2층 테라스로 나가봐. 무지개 보여!”
숨을 고르기도 전에 전화기 너머에서 아이들의
작은 발소리가 쿵쾅거리며 울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들려온 반가운 외침.
“엄마! 진짜 무지개야! 우와, 너무 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아이들도 이제 제주의
하늘에 귀 기울이고 있다는 걸.
육지에서의 삶은 바빴다.
하루 동안 하늘을 올려다보는 시간은 손에 꼽혔다. 창문을 통해 스치는 햇살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치기 일쑤였다.
하지만 제주에 와서 우리는 매일 하늘을 보고
구름을 읽고 바람의 결을 느낀다. 갑작스레 쏟아지는 비에도 어느새 갠 햇살에도 놀라지 않는 대신,
“오늘 하늘은 왜 이렇게 분주할까 변화무쌍한 하늘 아래, 무지개를 만나다?” 하고 묻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비가 내리면 빨랫줄 걱정보다 빗소리부터 먼저 듣는다. 구름이 몰려오면 우산보다 먼저 창문을 연다. 이 변화무쌍한 날씨와 동화된 우리 가족은 언제부터인가 제주의 기분을 함께 느끼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날 무지개는 그저 하늘의 풍경이 아니었다.
잠깐의 외출, 뜻밖의 발견, 그리고 그 장면을
나누고픈 마음. 자연은 그렇게 우리 가족을
또 한 번 하나로 묶어주었다.
제주에 와서야 알게 된다. 자연과 가까이 산다는 건
예측할 수 없는 날씨를 견디는 것이 아니라
그 변화에 스며들며 살아가는 일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