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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차가 이렇게 행복한 일이 될 줄이야

+26, 탁송된 차, 제주살이의 기록이 되다

by Remi

제주에 입도할 때 탁송으로 보내는 우리 차 안에는

육지 삶의 일부가 실려 있었다. 아이들 책,

서랍을 통째로 담은 박스, 생활용품, 이불, 주방 살림까지. 짐을 가득 싣느라 시트는 눌리고

트렁크는 숨도 못 쉬게 꽉 막혀 있었다.



그렇게 육지에서 도착한 차는 이미 지친

상태였고 이후 제주살이의 일상에 함께하며

바닷길도 여러 번 달렸다.
곽지, 협재, 이호…
우리의 작은 나들이는 대부분 바다로 이어졌고
그만큼 차 안은 점점 모래밭처럼 변해갔다.

발끝에 끼어 온 사방으로 흩어진 모래,
창틀 사이로 낀 소금기 어린 먼지.
도저히 눈 감고 지나칠 수 없어
드디어 아이들과 함께 마당 세차에 나섰다.



제주살이의 특별함은 꼭 멀리 가지 않아도 생긴다.
여기선 마당만 있어도 충분하다.
오늘은, 아이들과 함께 마당에서 세차를 했다.
대단한 계획도, 목적도 없던 하루였지만
그래서 더 좋았던 날.

주차된 차 옆으로 물호스를 끌고 나오는 순간부터

아이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비누거품이 만들어낸

하얀 세상이 마당 위에 펼쳐지고
아이들은 어느새 작은 세차 요원이 되어 있었다.

“엄마, 이건 내가 닦을게!”
“트렁크에 모래 장난 아니야.”

걸레를 손에 쥐고 발끝으로 닿지 않는 곳을

간신히 닦아내는 아이들 모습에 웃음이 났다.
차를 닦는다기보다는 이 시간 자체를 닦아내듯
우리의 하루를 반짝이게 만들고 있었다.

호스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에
서로 장난도 치고, 신발은 젖고, 바지는

엉망이 되고. 하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즐겼다.

육지에선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아파트에선 큰 소리도 물장난도 눈치가 필요했다.
하지만 제주에서는 마당이라는 공간 덕분에
이런 작고도 큰 자유를 아이들과 함께 누릴 수 있다.




물방울이 마당 바닥에 동그랗게 퍼지고

햇살이 그 위로 내려앉을 때 나는 오늘이

얼마나 반짝이는 하루였는지 알 수 있었다.


세차는 끝났고 차는 제법 말끔해졌지만

더 반짝이는 건 아이들의 웃음이었고 나의

마음이었다. 제주살이 속 아이들은 더 느긋해졌고

나는 삶의 속도를 낮추는 연습을 하고 있다.

그 변화가 참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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