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더 단단해지는 중
“엄마, 여긴 그냥 우리 동네 같아.”
오늘은 제주에서 처음으로 대형마트에 다녀왔다.
그간 장은 대부분 가까운 하나로마트나 농산물
직거래장에서 봤기에 이마트에 간 건 조금 특별한
외출이었다.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신제주.
제주에서 흔히 보던 너른 밭과 저지대의 돌담 풍경은
사라지고 멀리 아파트 숲과 넓은 도로가 나타났다.
차에서 내리자 아이들이 말했다.
“우아, 마트 주차장 얼마만이야!”
익숙한 간판들, 지상 주차장, 사람들이 많이
나드는 유리문..
제주에는 하나로마트가 유독 많다.
신선한 지역 농산물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데다
소규모 마트들이 각 마을마다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대형마트가 드물고 인기 없는 건 굳이 멀리 가지 않아도
먹을거리와 생필품이 충분히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차를 타고 도심까지 나가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고
무엇보다도 제주 사람들의 장보기는 정기적인 대형
소비보단 필요한 것만 딱 사는 실용적 소비에 가깝다.
그런데 아이들은 그 익숙한 풍경 속에서도
마치 낯선 곳을 여행하는 사람처럼 즐겁게 마트를 누볐다.
과자도 사고 우유도 담고
“엄마 이건 꼭 사자” 하는 눈빛도 여전했다.
그 순간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이제 이 아이들은 제주에 익숙해졌구나.
어쩌면 육지에서의 생활은 점점 흐릿해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요즘 아이들은 종종 아빠와
영상통화를 하다가 묻는다.
“우리 동네 놀이터는 어떻게 생겼지?”
“내방 한번 보여줘^^”
가끔은 놀이터 풍경을 보여달라고도 한다.
마치 기억 속 어렴풋한 장소를 확인하듯이.
환경은 기억을 만든다.
아이들은 환경에 따라 마음을 열기도, 닫기도 한다.
전학 온 제주학교에 새로 사귄 친구들과 잘 어울리고
학교생활에 먼저 적응하고 심지어 2학기 준비를 먼저 한다. 제주 바닷가 반려견 코코와 산책길까지 자기 텃밭처럼 여기는 걸 보면 엄마로서 그저 고맙고 신기하다.
아이들은 본래 유연하고 순수하다.
어른과 달리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
지금 이 순간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더 뛰어나다.
어른들이 과거를 곱씹을 때 아이들은 오늘을 살아낸다.
또한 아이에게는 안전한 애착 대상(부모)이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새로운 환경을 탐색하는 용기가 된다.
심리학적으로도 환경 변화에 잘 적응하는 아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부모와 안정적인 신뢰 관계, 변화에
대한 긍정적인 피드백 경험, 스스로의 선택이 존중받은 경험이 있다고 한다.
우리 아이들이 낯선 환경 속에서도 웃으며 걸어갈 수
있는 건 아마도 우리가 함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등굣길에 바라보는 바다가 다르고 방과 후 간식으로
먹는 떡볶이의 맛이 달라도 그 곁엔 늘 엄마가 있고
강아지 코코가 있고 서로의 웃음이 있으니까.
오늘 장바구니엔 익숙함에 대한 그리움이 조금 들어
있었다.
아직 제주살이 한 달도 채 안 지났지만
이제 우리 아이들은 제주의 공기를 자기 호흡처럼
들이마시고 있다. 변화는 두려운 게 아니라
조금만 익숙해지면 새로운 나를 만들어주는 시작이라는 걸 아이들이 먼저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