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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주말을 다시 배우다

+31일, 책 냄새로 시작해 노을로 물든 하루

by Remi

육지에 있을 때였다면 주말이면 어김없이 어딘가로 떠나야만 했다. 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풍경들,
예약한 식당, 계획된 일정, 그리고 붐비는 사람들.
그렇게 어디든 가야만 주말다운 주말이라 여겼던 우리였다.

그런데 제주에 와선 주말이 오히려 조용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먼저 든다.

‘오늘은 어디 안 가고 싶다’고
먼저 말하는 건 다름 아닌 아이들이다.

“주말엔 바다에 사람 많잖아. 그냥 도서관 가자.”

그 말 한마디에 마음이 일렁였다.
사람 많은 곳을 피해
고요한 곳을 찾는다는 감각
그건 여행자가 아니라 살아가는 이들의 태도다.

도서관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차분한 공기와 잔잔한 시선들이 반겨준다.
책장 사이를 천천히 걷고
검색대 앞에 나란히 앉아 원하는 책을 찾는 아이들.
그 모습이 어찌나 자연스럽던지
마치 오래전부터 이곳이 익숙했던 것처럼 느껴졌다.

그날은 제주의 오래된 도서관과
감성 가득한 별이 내리는 숲까지 두 곳을 다녀왔다.
책을 읽고, 체스를 두고, 잠깐 쉬었다가 또 독서를

하는 시간들, 빠르게 흐르던 일상의 강물 위에
잔잔한 돌멩이 하나를 툭 던지는 기분이었다.

제주에서의 주말은 더 이상 어디론가 떠나야만 하는 날이 아니다. 오히려 고요한 곳에 머무르며
서로의 숨소리와 책장 넘기는 소리를 듣는 날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아이들이 그런 주말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무척 기쁘다.





도서관에서는 몇 시간이고 머물렀다.
책을 읽고 검색대를 오가며 마음에 드는 책을 고르는

우리에게 어떤 여행보다 깊고 단단한 시간이 흐른다.

오후엔 집으로 돌아와 점심 먹고 잠시 쉰 후
햇살이 조금씩 부드러워질 무렵
집 근처 이호테우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수영은 안 할래. 그냥 해 질 때쯤 노을만 보자.”

또 한 번 아이들의 말에 마음이 출렁였다.
어쩌면 제주에서 진짜 달라진 건
바로 이 아이들일지도 모르겠다.

해변에 도착하니 모래 위로 긴 그림자들이 뻗어 있었다.
아이들은 맨발로 걸으며 발자국을 남기고 의자에 앉아 모래를 만지고 하얀 강아지는 내 무릎 위에서
세상의 평화를 다 안은 듯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해가 지는 바다는 이름 모를 감정으로 가득 찼다.
누군가는 손을 잡고 누군가는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우리는 그저 조용히 바라봤다.

수많은 여행보다 이 하루가 더 선명하게 기억될 것 같다. 도서관에서의 고요와 노을 아래서의 침묵이
우리를 더 단단하게 다정하게 만들어주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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