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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제주

+44일, 가까운 곳의 소중함

by Remi

제주에 오기 전엔 매일 어딘가로 떠날 줄 알았다.

바다를 보며 아침을 맞고 이름난 관광지를 누비며

하루를 보내고 그렇게 매 순간이 여행 같을 거라 믿었다. 실제로 첫 한 달은 그랬다.

하루에 한 곳씩, 바다든 숲길이든 이름 모를 작은 마을이든 낯설고 아름다운 풍경 속을 걷는 일이 일상이었다. 그 시절의 나는 낯섦이 주는 설렘에 한껏 마음을 열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일상의 리듬이 조금씩 달라졌다.




요즘 아이들은 오전엔 학교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오후에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거나 농구장, 다이소,

집 근처의 자그마한 카페에서 소소한 하루를 마무리한다. 그렇게 특별할 것 없는 나날이 오히려 깊고 단단하게 다가온다.


제주도민이 관광지를 잘 찾지 않는 이유를

이곳에 살아보며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늘 눈앞에 있는 풍경은 어느새 배경이 되고

설렘보다는 익숙함이 욕심보다는 여유가 스며든다.


나와 비슷한 마음을 아이들도 품고 있는 것 같다.

어떤 날은 내가 먼저 바다를 보러 가자고 혹은 유명한

관광지를 함께 가보자고 제안하면 아이들은 오히려

집이 좋다며 동네가 더 좋다며 고개를 젓는다.

멀리보다는 가까이, 특별함보다는 익숙함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그 모습이 낯설면서도 따뜻하다.


이제는 30분 이상 운전해야 하는 거리만 되어도

우리 가족에게는 작은 여행처럼 느껴진다.

가까운 마트, 동네 카페, 집 근처 산책길이 오히려

가장 자주 찾는 제주여행지가 되었다.

섬의 바깥을 그리워하던 마음이 섬 안의 고요에

머무는 법을 배우듯 우리도 그렇게 조금씩 제주에 스며들고 있다.


여전히 가끔은 바다 냄새가 그립고 어느 해안길이

문득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은 이 조용하고

평온한 일상이 더 소중하다. 잠시 머무는 여행이 아닌

사는 삶이 주는 감정이란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바람이 부는 어느 날, 다시 길 위에 오를 마음이 생기겠지. 그때까지는 이 잔잔한 나날을 그대로

곁에 두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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