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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놓칠 수 없는 단 하나의 시간

+48일, 하루가 물드는 장면

by Remi

제주에서의 날들이 길어질수록 이곳에서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이 분명해진다. 그것은 바로 바다 위로 서서히 내려앉는 노을을 바라보는 일이다. 육지에서는 그저 해가 지는 풍경일 뿐이라 생각했던 시간은 이곳에서 매번 나를 숨죽이게 하고 삶의 결을 고요하게 다듬는다.



이호테우해변은 노을로 이름난 곳이다. 바다 위에 잠긴 붉고 금빛의 빛살, 얕게 일렁이는 파도 위로 깃드는 저녁의 기운. 집과 그리 멀지 않기에 우리의 발걸음은 자주 이곳으로 향한다. 하지만 자주 온다고 해서 결코 그 감동이 닳아 없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매번 다른 빛, 다른 온도로 우리를 맞이한다.


이른 저녁, 식탁에 둘러앉아 따끈한 국물과 밥을 먹던 중, 우리 셋 중 누군가가 무심한 듯 그러나 묘하게 기다렸다는 듯 말을 꺼낸다.
"오늘은 저녁 일찍 먹고, 노을 보러 갈까?"

그 한마디는 마치 신호 같다. 서로 눈을 마주 보는 순간 마음이 먼저 앞질러 달려간다. 이호테우해변에 도착하, 바닷바람이 가장 먼저 우리를 감싼다. 짭조름한 소금기와 부드러운 해풍이 살결을 스친다. 저 멀리 수평선 위로 태양이 서서히 몸을 낮추고 있다. 금빛에서 주홍빛으로 다시 붉은 보랏빛으로 물드는 그 과정은 너무도 유려해서 마치 시간을 천천히 풀어쓰는 한 편의 시를 보는 듯하다.




아이들은 모래사장을 가볍게 달리며 발끝으로 파도의 온도를 확인한다. 코코는 모래 위에서 파도 소리를 따라가듯 이리저리 발걸음을 옮긴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이 순간이 언젠가 사진 속의 추억이 될 것을 안다. 그럼에도 지금은 기록보다 체온으로, 시선으로, 마음 깊숙이 새겨 두고 싶다.




노을은 빠르게 저문다. 방금 전까지 눈부시게 빛나던 바다는 어느새 잿빛과 남색이 섞인 밤의 옷을 걸치기 시작한다. 그 경계는 너무나도 부드러워 어디서부터 어둠이 스며드는지 알아차리기 어렵다. 그러나 그 느린 스며듦 속에서 하루의 무게가 고요히 내려앉는다.


나는 이곳에서 깨닫는다. 제주에서의 삶은 거창한 계획보다 이렇게 마음이 끌리는 대로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들이 쌓여 만들어진다는 것을. 바닷가에서의 노을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우리 셋의 마음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시간이다. 서로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마음 그 조용한 합의 속에서 우리는 오늘도 해가 지는 바다를 바라본다.



언젠가 이 풍경이 익숙해져 더 이상 가슴 뛰지 않게 될까 두려웠던 적도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발 앞에서 밀려왔다가 물러가는 파도와 하늘을 물들이는 빛을 바라보면, 그런 두려움은 허무하게 흩어진다. 노을은 매일 다른 옷을 입고, 매일 다른 표정으로 우리를 맞이하기 때문이다.



오늘도, 해는 바닷속으로 천천히 가라앉는다. 수평선 끝이 불타듯 붉게 물들고 그 위로 남은 빛이 구름에 스미듯 번진다. 우리는 그 앞에서 숨을 고른다.

말없이 그러나 서로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안다.

내일도 이 노을을 볼 수 있기를. 그리고 천천히 어둠이 우리를 감싸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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