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일 차, 산양큰엉곶에 뭐가 있길래
오늘은 날씨가 변화무쌍했다. 서귀포로 향하는 길,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갑작스러운 소나기가 쏟아졌다. 차창을 두드리는 빗방울은 굵고 거칠었지만 나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이젠 제주날씨에 익숙해진 탓일까. 비상깜빡이를 켜고 천천히 빗속을 가르며 길을 이어갔다. 빗줄기 사이로 스쳐 지나가는 한라산 자락이 잠시 안갯속으로 숨어들었다 나오는 모습이 마치 오늘이 특별한 하루가 될 거라는 예고처럼 느껴졌다.
도착한 산양큰엉곶은 빗방울이 씻고 간 초록이 더욱 짙게 빛나고 있었다. 입구를 지나자 숲은 촉촉한 숨결로 우리를 맞았다. 달구지길이라 불리는 무장애 산책로는 고요하면서도 생동감이 넘쳤다. 흙길 위에 번진 햇빛은 빗물에 반사되어 은빛 결을 띠었고 풀잎 끝에는 방울방울 물방울이 매달려 있었다. 길가에는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작은 집들이 나타났다.
마녀의 집, 백설공주의 오두막, 달토끼가 쉬어가는 의자까지. 아이들의 웃음이 잎사귀 사이로 퍼져나갔고 그 웃음소리가 숲 속의 빗물 냄새와 섞여 들어왔다. 가장 발길이 오래 머무는 곳은 숲 속의 기찻길이었다. 돌담과 나무문을 지나면 완전히 다른 세상이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빗방울이 뿌려진 공기 속에서 초록은 더 선명했고 그 풍경은 오래된 동화책의 한 장면 같았다.
사람들은 사진기를 들고 그 순간을 붙잡으려 애썼고 나도 그 마음을 이해했다. 나는 빗속에 젖은 풀내음을 깊게 들이마셨다. 바람은 빗방울을 가볍게 흩뿌리며 숲 속 깊은 곳의 향기를 데리고 왔다.
달구지길이 끝나고 숲길이 시작됐다. 발밑의 흙은 빗물로 더 부드러워졌고 이끼와 양치식물은 한층 더 짙은 색을 띠었다. 바위 위로 뿌리를 뻗은 나무들은 비에 젖어 윤기가 돌았다.
한참을 걷다 숲이 내어준 빛 한 조각 위에 서서 숨을 고르며 생각했다. 47일 동안의 제주살이 속에서 나는 매일 바다와 하늘을 이야기했지만 오늘처럼 비 속의 숲에서 하루를 보낸 건 처음이었다. 바다는 내 마음을 시원하게 씻어주는 존재였다면 오늘의 숲은 비에 젖은 채 그 안쪽 깊숙이까지 차분히 채워주는 존재였다.
산양큰엉곶의 숲은 우리가 떠난 뒤에도 그 자리에 남아 오늘의 비와 햇살 그리고 작은 웃음소리를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이 변화무쌍한 날씨마저도 제주가 내게 주는 선물처럼 느껴진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