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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동쪽 비밀의 숲

+51일

by Remi

제주의 길은 늘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서쪽의 바다는 자유롭고, 남쪽의 바다는 포근하다. 그리고 이번 여행에서 찾은 동쪽의 숲은 뜻밖의 고요와 비밀을 품고 있었다. 남편 휴가 마지막 날, 우리는 표선해수욕장의 빛나는 물결을 지나고 성읍민속촌의 오래된 시간을 걸어 마침내 제주 구좌읍에 있는 비밀의 숲에 다다랐다.



비밀의 숲 입구는 화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담백했다. 그 담백함 속에서 나는 오랫동안 기다려온 안도감을 느꼈다. 나무 향이 진하게 배어 있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은 작은 합창을 이루듯 흔들렸다. 여름의 한낮임에도 숲은 스스로 그늘을 짓고 있었고 그 안은 차분히 식어 있었다. 아이들은 숲길을 누비며 술래잡기를 했고 나는 남편, 그리고 반려견 코코와 함께 고요히 발걸음을 옮겼다. 제주에서 반려견 동반이 허락되지 않는 곳이 많았기에 이곳이 주는 자유가 더없이 반가웠다.


가장 놀라운 순간은, 코코가 갑자기 크게 짖으며 한 곳을 향해 선 순간이었다. 시선을 따라간 그곳에서 사슴 한 마리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우리는 숨을 죽였다. 아이들은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봤고 어른들도 자연의 무대 위에서 펼쳐진 장면에 넋을 잃었다. 동물원의 철창 넘어가 아니고, 카메라 속 화면이 아니라 진짜 숲의 한가운데서 만난 생의 순간. 그것은 예상치 못한 선물이자 여행 전체를 빛나게 한 기적이었다.


비밀의 숲은 험하지 않았다. 길은 완만했고 곳곳에 놓인 의자와 쉼터는 느린 걸음을 환영했다. 햇살은 나뭇가지 사이로 흘러내려 땅 위에 금빛 무늬를 수놓았고 새소리와 바람 소리는 우리 대화보다 깊었다. 아이들은 솔방울을 주워 장난을 치고 나는 그저 귀를 기울였다. 시간이 천천히 정리되어 가는 듯한 오래 기억될 순간이었다.



제주는 여행지로는 풍성하지만 반려견과 함께 갈 수 있는 곳은 생각보다 드물다. 그래서 이 숲은 더욱 귀했다. 코코와 함께 나란히 걷고 사진을 남기며 온전한 가족의 시간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발자국 하나하나가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 기억이 될 것이다.


숲을 빠져나오는 길, 탁 트인 들판 한가운데 놓인 나무와 의자가 인상적이었다. 아들이 그곳에 홀로 앉아 있는 풍경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푸른 숲과 초록빛 들판 속에서 아이가 앉아 있는 모습은 삶이 주는 평온함의 상징처럼 보였다.



그날, 표선해수욕장의 물빛, 성읍민속촌의 고즈넉한 풍경, 그리고 비밀의 숲의 고요가 한데 어우러져 하루가 완성되었다. 마지막에 마주한 사슴까지 모든 것이 계획하지 않은 듯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화려한 관광지를 찾기보다 자연 속에서 숨을 고르고 싶은 이들에게 나는 이곳을 건네고 싶다. 아이들과, 반려견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걸을 수 있는 숲. 제주 동쪽의 비밀의 숲은 이름 그대로 마음에 오래 남을 비밀 같은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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