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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승달의 위로

+60, 준비의 시간

by Remi

오늘은 아이들이 일주일 중 가장 늦게 돌아오는 날. 게다가 집에서 걸어서 불과 5분 거리에 있는 알바 가게마저 휴무라 아침부터 마음이 한결 가볍고 들떠 있었다. 그 들뜬 기운 때문이었을까. 아이들을 스쿨버스에 태워 보내고는 서둘러 차에 올라 오늘이 장날이라고 착각한 채 오일시장을 향해 달렸다.

90년대 댄스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흥얼거리며 달리는 길 이미 기분은 최고조에 올라 있었다. 텅 빈 듯 여유로운 주차장을 보며 오늘은 운이 따르려나 보다 싶었지만 막상 발을 디딘 시장은 고요하기만 했다. 그제야 주차장에 서 있던 아저씨께 여쭈어보고서야 알았다. 오일시장은 매달 2일과 7일에만 열린다는 사실을. 원래 알고 있었지만 왜 오늘은 2일, 5일로 착각했는지 모르겠다!

예전 같았으면 허탈감과 짜증이 먼저 치밀었을 텐데 오늘은 달랐다. 서둘러 움직였다는 뿌듯함, 차 안 가득 울려 퍼지던 음악의 여운이 여전히 가슴을 두드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 수도 있지, 뭐.’ 그렇게 또 하루의 제주살이가 소소한 해프닝 속에 유쾌하게 흘러갔다.


아이들이 돌아오기 전, 저녁상은 이미 완벽하게 차려졌다. 고등어구이, 콩나물두부국, 양배추찜, 오징어젓갈, 버섯구이 그리고 오늘 처음 시도한 가지튀김까지. 처음엔 손사래를 치며 맛보기를 꺼리던 아이들이 한입 먹고는 “이게 제일 맛있다!”며 극찬을 쏟아내니 그 한마디가 오늘의 수고를 단숨에 보상해 주었다. 내일은 또 어떤 반찬으로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을까 부엌에서의 시간이 기다려질 정도였다.



저녁바람이 유난히 선선하던 오늘, 식사 후 아이들과 코코를 데리고 산책을 나섰다. 차를 타고 밤늦게 집에 돌아온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천천히 걸으며 동네를 둘러보는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해가 지고 7시가 넘으면 동네는 숨을 고르듯 고요해진다. 이웃들은 제각기 집 안으로 들어가고 마을길엔 인기척조차 사라진다. 하지만 우리는 굳이 그 분위기에 발을 맞출 필요가 없었다. 아이들과 코코의 발걸음은 자유롭고 그 고요는 오히려 우리 가족만의 작은 축복 같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하늘에 걸린 가느다란 초승달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사진을 찍으라 재촉했고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담아냈다. 막 태어난 듯 여리고 가냘픈 빛이 어스름한 하늘 위에 매달려 있었다.


문득 떠올랐다. 달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시간을 단순히 소멸로 보지 않고 새로운 달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준비의 시간’으로 여겼다는 문장.

우리 삶도 다르지 않다. 어둠 같은 시간이 반드시 찾아오지만 그 속에서야 비로소 다시 빛날 힘을 얻는다. 아이들과 함께 바라본 그 초승달은 오늘 하루를 마무리하는 내 마음에도 잔잔한 위로처럼 스며들었다.
그렇게 또 하나의 제주살이가, 달빛 아래 고요히 쌓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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