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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못할 어느 장날의 풍경

+62,아들의 한마디가 내 마음을 녹였다

by Remi

물결처럼 흐르던 8월의 끝자락, 62일차 제주살이의 하루가 깊은 숨결로 다가왔다. 25일, 한껏 들뜬 마음으로 향했던 제주 오일장은 안타깝게도 허탕으로 돌아섰고 그 허탈한 마음을 달래려 이틀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아들 방과 후 수업이 없는 날이라 약속했던 대로 함께 다시 시장으로 향했다. 나는 일터에서 돌아오자마자 서둘러 장바구니를 챙기고 품에 작고 따뜻한 코코까지 안은 채 뜨겁게 달아오른 오후의 태양 아래 우리는 길을 나섰다.


이날의 제주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말끔했고 기온은 섬의 풍경마저 숨 막히게 할 듯한 33도에 달했다. 시장 입구를 들어서는 순간 바람 한 점 없는 공기 속에서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더위는 피부에 짙게 내려앉았고 아들의 이마 위로는 땀이 비 오듯 흘렀다. 머릿속에 꼭꼭 새겨두었던 장보기 목록도 무더위 앞에선 순식간에 하얗게 지워졌다. 단단히 마음먹고 오일장다운 장보기를 하겠다 다짐했지만 폭염 앞에서는 의지도 모래성처럼 무너져내렸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하나 둘 눈에 들어오는 대로 장바구니에 담았다. 마트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놓인 싱싱한 채소와 해산물들. 값은 저렴했지만 그 안에 담긴 삶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장을 보다 문득 고개를 들자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선풍기 하나 없이 자리를 지키며 채소를 팔고 있는 할머니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주름진 손등 위로 햇살이 내려앉고 그늘조차 없는 천막 아래에 앉은 그들의 모습은 너무나 아리고 슬펐다. 마치 오래된 풍경화 속에서 걸어 나온 인물들처럼 시간과 계절을 품고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

그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조용히 무언가 무너져내렸다.


육지에서의 나는 종종 힘들다는 말로 하루를 덮곤 했지만 지금 이곳에서 마주한 삶의 단면은 그 말이 얼마나 가볍고 덧없었는지를 일깨워주었다. 온몸으로 삶을 버텨내고 있는 저 분들 앞에서 나는 무엇을 두고 힘들다 했던가.


내가 한 손에 코코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걷는 동안 아들은 한 치의 불만 없이 묵묵히 양손 가득 장을 들었다. 그 작은 손에 매달린 무게가 제법 컸을 텐데도 “엄마, 더 살 거 없어? 더 사도 돼. 장날 자주 오는 거 아니잖아”라며 살갑게 웃어주었다. 순간 가슴 한가운데서 무언가 따뜻하게 번져나갔다.
'우리 아들 이제 든든한 친구같구나.' 아들의 모습이 이날따라 너무 기특하고, 고맙고 또 미안한 감정들이 뒤섞인 채로 조용히 나를 적셨다.


양손 가득 짐을 들고 주차장까지 가는 길은 더 길고 더 뜨거웠지만 우리는 한 마디의 투정도 없이 걸었다. 집에 도착해 장바구니를 풀어놓는 순간 그것들은 단순한 식재료가 아니라 오늘의 뜨거운 시간과 감정의 조각들이 되어 주방을 채웠다.


탱탱한 옥수수, 윤기 나는 가지그리고 할머니의 손에서 막 건네받은 마늘과 브로콜리 두 다발까지. 장본것들을 하나하나 꺼내며 나는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이 맛에 오일장을 보는 거구나.’



제주살이의 하루하루가 특별하지 않아도 이런 날들이 쌓여 나만의 계절을 만들고 있었다. 장날의 열기 속에서 나는 사람의 온기와 가족의 사랑 그리고 삶의 진실한 무게를 다시금 배웠다.
그래서일까. 다음 장날이 벌써 기다려진다. 놓치고 싶지 않다. 그날의 햇빛도, 그날의 땀방울도, 그날의 마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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