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나의 버킷리스트, 그러나 오늘은
집에서 차로 한 시간이 걸리는 성산으로 드라이브를 다녀왔다. 바람을 가르며 달리던 길, 돌아오는 길목에서 우연처럼 마주한 작은 책방이 있었다. 이름부터 다정한 울림을 가진 동당서림. 외관은 소박한 시골 가게와 다르지 않았지만 문을 여는 순간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작은 우주에 발을 들인 듯 공기마저 달라졌다.
민트빛 창틀과 손글씨 간판이 반겨주는 입구는 담백했으나 그 담백함 속에 묘한 설렘이 숨어 있었다. 요란하지 않은 인테리어 덕분에 오히려 시간의 속도가 느려졌다. 발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책장을 훑으며 머무르고 싶은 여유가 이곳에는 있었다.
책방 안은 작고 단아했다. 정갈히 꽂힌 책들은 상업적인 베스트셀러가 아니라 주인의 안목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독립출판물과 작은 출판사의 책들이었다. 특히 제주의 바람과 흙 그리고 사람의 이야기를 담은 책들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책상 위에는 엽서와 손글씨 노트, 독립 작가의 작품집들이 정성스레 놓여 있었다. 마치 주인이 직접 손으로 골라 건네는 듯한 진심이 배어 있었다. 책은 단순히 물건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이 오가는 매개체임을 이 작은 책방이 증명하고 있었다.
책방 한쪽에는 비밀책이라는 코너가 있었다. 갈색 포장지에 싸인 채 표지도 제목도 없는 책들. 오직 짧은 손글씨와 몇 개의 키워드만이 선택의 단서였다. 직접 내용을 들여다볼 수 없으니 온전히 감각과 직관으로만 고를 수밖에 없다.
그 책들은 마치 누군가가 내 마음을 미리 알고 준비해 둔 편지 같았다. 오늘은 꺼내 오지 못했지만 언젠가 홀로 다시 오게 된다면 꼭 품어가고 싶었다. 여행이 끝난 뒤에도 오래도록 여운으로 남을 작은 선물이 될 것 같았으니까.
사실 제주에서 하고 싶은 나의 버킷리스트는 분명했다. 독립책방에서 혼자만의 힐링 시간을 보내는 것. 여행지의 카페도, 눈부신 바다도 좋지만 책방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는 그 순간만큼은 세상과 단절된 듯 깊은 위로를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은 혼자가 아니었다. 아이들과 함께였다. 그런데 놀라운 건 아이들이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임을 알기라도 하듯 시끄럽게 굴지 않았다. 각자 책을 펼쳐 들고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 그 모습이 어쩐지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혼자만의 시간을 꿈꾸었지만 아이들과 나란히 책장을 넘기던 그 장면 역시 내 마음속에 오래도록 머물 소중한 풍경이 되었다.
제주 여행이라 하면 흔히 바다, 오름, 카페를 먼저 떠올리지만 책방에서의 몇 시간은 여행을 훨씬 더 깊고 단단하게 만든다. 책장을 넘기며 창밖으로 스며드는 햇살과 흔들리는 나무를 바라보노라면 복잡했던 마음도 차분히 정리된다.
혼자라면 사색의 시간이 되고 아이들과 함께라면 책과 가까워지는 계기가 된다. 결국 여행에서 기억에 오래 남는 것은 화려한 장소가 아니라 이렇게 조용히 머물렀던 순간일지도 모른다.
동당서림은 책이 말을 걸어오는 공간이었다. 여행의 분주한 걸음을 멈추게 하고 내 마음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게 하는 따뜻한 쉼표 같은 곳이다. 언젠가 혼자만의 시간을 위해 다시 찾아도 좋겠지만 오늘처럼 함께 머무는 고요도 내겐 충분히 빛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