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항파두리 항몽유적지를 걷다
제주 애월의 한 모퉁이에 고려의 기억이 남아 있는 곳이 있다. 이름조차 단단하고 굳센 항파두리 항몽유적지이다. 삼별초가 몽골에 맞서 마지막까지 버티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토성은 수백 년의 시간을 견뎌낸 채 여전히 땅 위에 서 있다. 역사는 책 속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실제로 그 길을 걸어보니 돌담과 흙길이 품고 있는 서늘한 숨결이 전해졌다.
전시관과 토성 내부는 반려견이 들어갈 수 없어서 나는 코코와 함께 밖으로 이어진 토성 가는 길을 따라 걸었다. 발아래 흙이 단단히 뭉쳐진 산책로는 오래된 시간을 품은 듯 고요했고 양옆으로 펼쳐진 들판은 햇빛에 반짝이며 여름의 생기를 내뿜고 있었다. 코코는 작은 몸으로 풀숲을 누비며 냄새를 맡았고 나는 그 뒤를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역사의 무게와 현재의 평온이 나란히 흐르는 순간이었다.
길을 걷다 문득 시선을 빼앗긴 건 붉게 타오르듯 피어 있는 배롱나무였다. 백일 동안 꽃을 피운다 하여 붙은 이름처럼 긴 계절 동안 이곳을 환히 밝혀주는 나무였다. 돌담과 기와지붕 옆에서 한껏 피어난 꽃은 마치 오래된 시간 위에 얹힌 화려한 장식 같았다. 그 붉은빛 앞에서 사진을 찍으니 코코의 까만 눈동자와 꽃잎이 묘하게 어울리며 한 폭의 풍경화가 되었다. 사진 한 장에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순간이 담겼다.
이곳을 걷다 보면 역사라는 단어가 단순한 과거형으로만 남지 않는다. 성을 쌓던 사람들의 땀과 두려움 그리고 굳은 결의가 바람 속에 스며든 듯 느껴진다. 그러나 동시에 그 길 위를 걷는 지금의 나는 반려견과 함께 여유롭게 산책을 즐기고 있다. 과거와 현재가 한 장의 겹쳐진 사진처럼 눈앞에 놓여 있는 기분이었다.
항파두리 항몽유적지는 단순히 문화재를 보러 가는 곳이 아니다. 역사가 품은 무게와 제주의 계절이 어우러져 삶의 속도를 잠시 늦추고 사유하게 만드는 공간이다. 아이들과 함께 온 가족은 역사 공부를 겸하며 걷기에 좋고 반려견과 함께 찾은 이들은 자연 속 산책로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여름의 배롱나무, 가을의 억새, 겨울의 고요한 바람까지 계절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줄 것이다.
산책을 마치고 나오는 길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수백 년 전 이곳을 지키던 이들은 얼마나 절박한 심정이었을까. 그리고 지금의 나는 얼마나 사소한 것에도 위로받고 있는 걸까. 코코가 앞에서 꼬리를 흔들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 모습만으로도 마음은 충분히 충만해졌다. 역사의 무거움 속에서도 삶은 계속되고 꽃은 피어나고 사랑하는 존재와의 산책은 여전히 빛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