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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제주공간, 테라스 국화

+84 문턱에서 만난 가을, 국화 이야기

by Remi

가을은 언제나 조용히 스며든다. 창문을 열면 들어오는 바람의 결이 달라지고 저녁빛은 한층 더 깊어진다. 계절은 그렇게 눈에 띄지 않게 다가오지만 어느 날 문득 이제 가을이구나하고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다.


집 안의 풍경도 예외는 아니다. 빛이 머무는 자리, 공기의 흐름 그리고 마음의 리듬까지도 계절의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나는 매번 계절이 바뀔 때 집 안에 작은 변화를 주고 싶어진다. 제주에서 이 계절의 전환점에 들여놓은 것이 바로 국화 화분이었다.



국화 화분 하나만으로도 집의 공기는 전혀 다른 빛깔로 물든다. 작은 공간이라도 꽃이 있으면 시선이 머무는 자리가 생기고 은근히 번지는 향은 마음을 고요히 감싸 안는다.



특히 선선한 바람이 유난히 반가운 가을의 초입 국화는 계절을 가장 온전하게 불러오는 존재다. 단정하게 모여 핀 작은 꽃송이들은 누군가의 다정한 말처럼 은근히 오래 울림을 남기고 스쳐 지나가는 하루의 무게를 잠시나마 내려놓게 한다.



나는 국화를 거실이 아닌 테라스에 두었다. 집을 나설 때와 들어설 때 문턱에서 가장 먼저 눈길이 닿는 곳. 꽃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 자리는 특별해진다. 아침에는 국화가 하루를 시작하는 인사를 건네듯 밝고 단정하게 나를 맞이하고 저녁에는 조용한 위안으로 문득 마음을 가볍게 한다. 꽃은 말을 하지 않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환대의 기운을 전하는 법이다.



국화는 화려함으로 시선을 빼앗는 꽃이 아니다. 대신 오래도록 함께하며 은근한 매력을 드러낸다. 절제된 빛깔과 단아한 자태 그리고 진실과 평온을 품은 꽃말 덕분일까. 국화를 곁에 두면 집 안의 풍경이 단순히 장식으로 머무르지 않고 마음을 다독이는 쉼표가 된다. 계절이 바뀌는 시점에 국화를 들여놓으면 공간뿐 아니라 내면의 리듬까지도 차분히 가라앉는다.



무심히 지나칠 수도 있는 작은 화분이 삶의 속도를 바꿔주기도 한다. 국화는 우리에게 속삭인다.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 이 계절의 흐름에 몸을 맡겨도 충분해.”



나는 가끔 국화 앞에 앉아 시간을 길게 늘린다. 책 한 권을 펼쳐 두기도 하고 그냥 차를 마시며 꽃잎의 결을 따라가기도 한다. 그 순간에는 집이 단순한 생활의 공간이 아니라 사색과 쉼이 머무는 작은 정원으로 바뀐다.



한 송이의 꽃이 일상에 불어넣는 힘은 생각보다 크다. 국화는 화려한 문장보다 더 묵직한 위로를 건네며 오래도록 자리를 지킨다. 그래서일까. 가을을 집 안에서도 온전히 누리고 싶을 때 국화 화분만큼 든든한 벗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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