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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진부함과 무심함이 남기는 잔향

『안녕이라 그랬어』를 읽고

by Remi

김애란 작가의 『안녕이라 그랬어』를 읽으며 가장 오래 남았던 부분은 삶을 바라보는 태도였다. 작가는 “삶은 대체로 진부하지만 그 진부함의 어쩔 수 없음, 그빤함, 그 통속, 그 속수무책까지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라고 말한다. 이어서 “인생의 어두운 시기에 생겨나는 건 결국 그 어떤 세련된 첨단도 아닌 그런 말들인 듯하다. 쉽게 오래된 말, 다 안다 여긴 말, 그래서 자주 무시하고 싫증 냈던 말들이 몸에 붙는 것 같다"라고 덧붙인다.


단순한 위로 같지만 사실 이런 문장이야말로 아픔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가장 절실하다.



또 다른 문장에서는 "나이 들면 타인에 대한 기대치를

적당히 낮춘, 까다로운 듯 무심한 관심이었다."

작가는 그것을 단순한 냉소가 아니라 상처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 세운 거리감으로 풀어낸다.



작품의 또 다른 축은 타인에 대한 시선과 거리다.

“내게 별 관심 없는 이들에게 내 인생을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는 구절은 주인공이 세상과 맺는 방식이 방어적 거리 두기임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냉소와 체념만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보호하려는 주체적 선택이 담겨 있다.



제주살이를 하며 나 또한 비슷한 마음을 느낀 적이 있다. 이곳에서 만난 낯선 시선 속에서 굳이 내 선택을 길게 설명하고 싶지 않을 때가 많았다. 타인과의 거리는 결국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고통이 나를 압도할 때 나는 일부러 집밖으로 나가 수백 년 된 나무들 사이를 걷는다. 갓 걸음마를 뗀 아기가 엄마 아빠의 가랑이 사이를 통과하듯 키 큰 나무들이 줄지어 늘어선 공원을 지나간다. 마치 거길 다 통과하면 내가 더 자라나기라도 할 것처럼. 그런 뒤 집으로 돌아와 세상에 고통을 해결해 주는 자연 따위는 없음을 깨닫는다. 그러곤 이미 아는 걸 한번 더 깨달으려 다음날 다시 같은 장소로 나간다. 내 고통에 무심한 자연 앞에서 이상하게 안도한다."


이 문장은 제주살이의 풍경과 겹쳐진다. 아이들과 함께 숲길을 걸을 때 혹은 바다를 마주할 때, 자연은 어떤 뚜렷한 답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고통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은 채 받아내는 그 무심함이 오히려 크고 단단한 위로로 다가온다. 나 역시 그런 순간마다 김애란의 문장처럼 ‘내 고통을 무시하는 자연 앞에서 이상하게 안도’했다.



『안녕이라 그랬어』는 청춘의 아픔을 섬세하게 그리면서도 그것을 거창한 메시지로 포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부한 말, 무심한 자연, 무심한 타인을 통해 삶의 본질적인 결을 드러낸다.

제주살이의 일상 또한 이와 닮았다. 특별할 것 없는 매일이지만 그 속에서 나와 아이들은 조금씩 자라난다. 진부한 하루들이 결국은 가장 큰 서사가 된다.

그래서 이 작품은 단순한 소설을 넘어 삶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문학적 성찰을 건네준다. 진부하고 무심하지만 그 속에 우리가 살아내는 모든 의미가 깃들어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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