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손맛을 기록하다

겨울을 준비하는 손, 그 안에 담긴 사랑

by Remi

5일이라는 시간이 이렇게 짧을 줄 나는 미처 몰랐다.
셋째 날 쯤이 되어 “이제 이틀 남았다”라고 스스로 세고 있는 나를 보며 엄마와의 시간은 항상 예고 없이 빠르게 지나간다는 사실을 다시 감각했다. 정확히 3개월 만에 제주에 와준 엄마는 마치 잠시 모래사장에 앉았다가
다시 고요한 육지의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물새 같았다. 하지만 그 짧은 날들 사이에 엄마는 내가 앞으로 맞게 될 한겨울을 텅 비지 않도록 김치의 온기로 가득 채워놓고 돌아갔다.






엄마는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여행 가방을 내려놓기도 전에 첫날엔 배추김치, 둘째 날은 파김치와 깻잎김치.
무말랭이까지 씻어 말리고 총각무를 하나하나 골라 손질하며 오이지 항아리를 열었다. 그리고 마지막 날, 부엌의 하얀 김장 장갑을 벗으며 엄마는 그제야 숨을 한 번 길게 내쉬었다.

그 5일 동안, 우리 집 부엌은 겨울을 저장하는 성실한 창고 같았다. 새벽의 찬 공기에서 배추를 헹구던 물살의 소리, 고춧가루가 양념에 스며들며 만들어내는 깊은 붉음, 손끝으로 무의 결을 확인하고, 파의 푸른 잎을 정성스레 다듬던 엄마의 움직임. 그 모든 풍경이, 제주라는 바람 센 섬에서 내 삶을 다시 단단하게 붙들어 주는 밧줄이 되었다.




엄마는 말수가 적었다.
그래서 어떤 마음은 말 대신 동작으로 남았다.
배추 한 포기를 반으로 가르는 소리, 양념을 버무릴 때 나는 촉촉한 마찰음,
통마다 공기를 빼며 가볍게 눌러주는 그 손짓.
그게 다 말이었다.
“내가 너와 손주들 겨울을 지켜줄게.”
“너 혼자가 아니야.”
“네가 사는 이 섬에, 내 마음도 같이 묻어둘게.”

엄마는 제주에 올 때마다 한 번도 “놀러 왔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항상 “뭘 해줘야 할까”를 먼저 묻고
“내가 왔으니 이건 걱정 마라”는 식으로 일부터 찾았다.
그러면서도 집 앞 바닷가를 산책하다가
아이들이 조개껍데기를 줍는 모습을 보면
말없이 미소를 짓고 멀리서 파도 부서지는 소리를 한참 동안 바라보곤 했다.

그러나 나는 안다.
엄마는 제주가 좋아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 ‘딸과 손주’들이 있기 때문에 오는 것이다.
섬의 풍경이 부른 게 아니라 섬에서 살아가는 우리를 걱정하는 마음이 엄마를 부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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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를 담그는 동안, 엄마의 손등은 유난히 붉었다.
찬물에 오래 닿은 손은 금세 거칠어지고
양념이 스며든 손톱 주변은 작은 상처처럼 얼룩졌다.
나는 그 손을 잡아보려다 멈추고
대신 수건을 건네며 말했다.
“엄마, 손 아프지 않아?”
그러자 엄마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프면 안 하지. 니들 먹을 건데.”

그 말 한 줄이
제주의 겨울바람보다 더 깊게 가슴을 저렸다.






엄마가 떠나던 날 아침, 우리 집 냉장고에는
김치통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배춧잎 사이에는 양념이 곱게 스며들어 있었고 오이지는 물기를 꼭 짜서 정갈하게 넣어두었다. 깻잎김치는 향이 퍼지지 않게 하나씩 접어 담겨 있었고 무말랭이는 종이처럼 말라 단단한 삶의 냄새가 났다. 엄마가 만든 김치는 어떤 음식보다 엄마의 방식이 고스란히 담긴 기록이었다.






제주살이를 시작한 뒤, 나는 이곳에서 참 많은 걸 배우고 버텨내고 다시 세워가고 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여전히 어렵다.
바다를 건너와야 하는 거리만큼
엄마의 손맛이 점점 그리워지는 일.
도시에서 살 때는 몰랐다.
필요하면 달려갈 수 있는 거리에
엄마가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안 도였는지를.





이제는 음식 하나도
쉽게 부탁할 수 없는 곳에 살고 있다.
김치가 떨어져도 ‘엄마, 좀 만들어줘’라고 할 수 없는 거리. 아이들 생일에 미역국을 끓여주러
금방 달려올 수 없는 거리.
엄마의 노력이 손에 잡힐 만큼 가까운 곳이 아니라는 사실이 어느 순간 나를 가장 외롭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번 방문에서 깨달았다.
엄마는 거리보다 마음이 먼저 움직이는 사람이라는 것을.
엄마는 제주가 멀어도 오고
힘들어도 만들어주고
시간이 없어도 머물러주고
그리고 결국 떠나더라도
예상보다 더 단단한 사랑을 남겨놓고 간다는 것을.




엄마가 돌아간 뒤,
부엌에는 김장을 끝낸 다음 날만 느낄 수 있는
고요한 허전함이 남았다.
싱크대 위에 놓인 하얀 장갑, 절이던 배추를 헹군 빨간 대야, 깻잎을 말리던 작은 채반. 그 모든 흔적이
엄마가 여기에 있었음을 말해주는 증거였다.

나는 냉장고 문을 열어
엄마가 담아놓고 간 김치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건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엄마가 나와 아이들 곁에 살고 싶지만
살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미리 남겨놓고 간 마음의 조각 같았다.

손맛을 기록한다는 말은 결국 사랑을 기록한다는 말과 같다. 엄마의 손맛을 잊지 않으려고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엄마가 이곳에서 우리 가족에게 어떤 마음을 남기고 가는지를 놓치지 않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다.

엄마의 손이 닿은 김치는
겨울 내내 우리 식탁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그 김치를 먹을 때마다
나는 다시 떠올릴 것이다.
배추를 들고 웃던 엄마,
아이들과 장난치던 엄마,
손에 물기를 털며 “춥지?”라고 묻던 엄마.

이 글이 언젠가 엄마에게 닿을까.
혹은 같은 마음을 가진 누군가에게 닿을까.
그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하나다.
엄마의 손맛은 단순한 기술이나 레시피가 아니라,
딸과 손주들을 향한
가장 깊고 오래된 사랑이라는 것.

그래서 나는 오늘,
엄마가 남겨놓고 간 그 따뜻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잊지 않기 위해
이 기록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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