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쓰
한국 문학의 자리
오랜만에 읽는 한국 소설이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한국 소설은 거의 읽지 않았다. 읽는다 해도 고전 명작보다는 독립 출판된 책을 주로 읽었다. 부로 한국 소설을 피했다기보다는 좋아하는 작가도, 좋아하는 장르도 해외에 더 많기 때문이랄까? 비단 책뿐만이 아니라 영화도 마찬가지다. 책만큼이나 편향적이지는 않지만 한국 영화보다 해외 영화를 훨씬 더 많이 보고, 더 좋아한다. 그러니 내 공상이나 꿈조차도 서양적 사고방식과 양식을 따르는 경향이 있다. 가령, 어떤 가상의 이야기를 머릿속에 그릴 때 그 주인공들이 한국 사람이 아닌 서양인이 모습을 띄고 있다던가 한국 배경이 아닌 외국의 배경을 하고 있다던지. 뭐 그런 거다. 아마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러할 거 같다. 정보나 콘텐츠의 국경이 사라지고 누구나 쉽게 다양한 나라의 콘텐츠를 즐길 수 있다 보니 선택지도 다양해지고, 더 많은 자본이 투여되고, 더 많은 인지도를 가진 서양 콘텐츠가 우리나라의 콘텐츠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극장에서 한국 영화 쿼터제를 운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서론이 길어졌지만 어쨌든 오랜만에 한국 소설을 읽었다. 스릴러, 추리 장르를 좋아한다. 이런 장르의 소설을 생각했을 때 딱 떠오르는 작가들이 몇 있다. 아가사 크리스티, 히가시노 게이고, 귀욤뮈소. 한국 작가는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베스트셀러에 꽤나 오랜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또 채쓰의 엄청난 추천에 힘입어서 한번 읽어봤다.
<홍학의 자리>는 시골 학교에서 학생과 정분이 난 선생이 자신과 정사 이후 죽은 채로 발견된 학생의 시신을 은폐하면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을 다루고 있다. 선생은 본인이 학생을 죽이진 않았지만 당연히 자신과의 정사 사실이 밝혀질까 봐 시체로 발견된 학생의 사체를 호수에 버리고, 알고 보니 이 학생이 부모님들 간의 관계로 다른 학생으로부터 폭력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 등이 밝혀지면서 ‘과연 누가 피해 학생을 죽였는가’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적당한 타임에 적당한 반전이 들어가 있고, 개연성도 좋았다. 꽤나 잘 짜인 추리 소설.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이 세상에서 선생님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요”
이 소설에서 유독 많이 나오는 말이다. 별거하고 있는 그 선생님의 아내도, 죽음을 당한 그 학생도 주인공에게 계속해서 ‘나만이 당신을 이해할 수 있다’고 얘기한다. 그렇지만 그들 중 실제로 주인공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누구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주인공은 그야말로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다.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는 이들에게 줄곧 차가운 시선을 던지는 주인공이다. 누군가를 그토록 사랑하는 게 가능한가? 아직도 모르겠다.
나의 경우도 그렇다. 나에게 사랑이란 감정이 쌍방이었던 적은 거의 아니 전무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나를 좋아하지 않았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내가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사랑이란 주제는 항상 어렵다. 누군가 열렬하게 서로를 사랑하는 모습에 영 공감을 못하는 것도 아니지만, 나에게 그 문제를 대입했을 때 공감하기는 쉽지 않다. 나는 모두를 이해하고 꿰뚫고 있는 반면에, 나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줄곧 생각한다. 현실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나 역시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고, 그들 역시 똑같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무도 죽이지 않은 아이. 어른들의 관심에서 벗어난 아이의 문제도 눈에 띄었다. 지독하게 성악설을 믿는 나로서, 나 역시 어린 시절부터 꽤나 영악했기에, 어린아이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관심과 사랑에서 벗어난 존재는 언제나 안타깝다. 나이와는 상관없이 복지와 관심의 사각지대에서 사는 사람들이 많다. 어린아이와 마찬가지로 힘없는 노인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을 매번 힘없고 무기력하게 표현하는 것에 찬성한다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런 환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질 필요는 있다는 거다. 그렇다고 또 발 벗고 나서서 이들을 도울
아량 넓은 나 자신이 아니기는 하지만… 앞으로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는 자신이 되어보자…
자신 없기는 하지만… 노력해 보겠다…!
홍학무새의 이유 * ***강스포 주의 ****
한 아이의 아빠가 다급하게 응급실로 뛰어들어왔다. “저희 아이가 교통사고가 크게 났습니다, 진료가 시급합니다. 설태현 의사님 좀 불러주세요.” 아이 아빠는 응급실에 다행히 아는 의사라도 있었는지 한 의사를 지목했다. 의사는 자신을 지목한 보호자와 환자가 있다는 사실에 의아해하며 환자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의
사는 의식을 잃고 외상을 크게 입은 환자를 보며 놀라 소리친다. “우리 아들..!” 이들은 무슨 관계일까?
정확한 본문은 기억나지 않지만 대강 이런 유의 글을 고등학생 때 한 친구가 전해줘서 읽은 적이 있다. 읽고 나서도 한참 동안 그들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봤지만 뾰족하게 답을 내릴 수 없었다. 입양아인가? 그렇게 쉬운 문제를 낼 리가 없잖아? 하며 고민했던 기억이 있다. 뭔가 숨겨진 반전이 있겠지라면서 고민하고 있는데 친구가 해답을 줬다. “그 의사는 엄마야.”
한동안 이 문제가 뇌리에 박혀있었다. 지문에 전혀 다른 단서가 없었음에도 당연히 달려온 의사가 남자
일거라고 가정한 거다. 뒤통수가 얼얼했다. 내가 이렇게 고정관념에 단단히 묶여있는 사람인지 몰랐다.1
<홍학의 자리>의 킥은 아마 이 마지막 반전일 거다. 그동안 ‘채다현’이라는 대명사로만 표기되어 있던 피해 학생의 성별이 사실은 남자였다는 것. 책 제목부터 이 채다현이라는 학생이 계속해서 “홍학 좋아, 홍학 최고, 네덜란드 홍학 보러 가고 싶어”라면서 온갖 곳에 홍학 사진 붙여 놓았던 이유도 이 마지막 킥을 위한 복선이었다. 홍학은 동성애가 많은 동물이란다. 네덜란드는 동성 결혼이합법이다.
단순히 재미를 위한 반전은 아니었을 거라 (믿고)싶다. 작가의 말을 참고해서 봤을 때 작가는 스릴러라는 장르가 일종의 경고 메시지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작가는 이 반전을 통해 사람들의 고정관념에 일종의 경종을 울린 것일 것이다.
한국 문학에서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는 점에서 아주 이의가 있고 한국 문학이었기에 통하는 킥이기도 하지 않았냐는 씁쓸한 생각도 든다.
1 예쓰 10월 25일 오ㅏ.. 나도 충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