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쓰
삼체를 읽은 이후 웬만한 SF 소설은 전부 진부하고 유치하게 느껴지던 와중에 읽게 된 대작이다. <마션>은 스토리의 개연성이나 플롯보다는 작가의 문체(?)가 너무 재밌고 유쾌해서 읽어 내려갔는데 (그래서 영화보다 책이 500배 재밌었다) 이건 작가의 최대 장점인 유쾌한 문체가 살짝 잊힐 정도로 (아주 살짝) 재밌다. 삼체보다는 비교적 술술 읽어갈 수 있지만 절대 100% 이해할 수는 없다. 그래도.. 내 반나절을 이 책 한 권과 바꿀 수 있을 만큼 재밌게 읽은 책이다.
‘지구종말’을 그리는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많았고 현재도 많으며 앞으로 더 많아질 것이다. 이 책에서 택한 지구 종말의 방식은 태양의 온도가 떨어지는 형태다. 알 수 없는 미생물이 태양 전체를 감염시켜 에너지를 서서히 잃어가면서, 지구온난화와 그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던 지구는 되려 빙하기를 맞이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던 연구자들은 다른 은하, 다른 행성들도 이 미지의 미생물에 감염되고 있음을 밝혀냈고, 감염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에너지를 빼앗기지 않는 단 하나의 행성을 찾았다. 행성에 가기
위해 성간 비행이 가능한 '헤일메리’라는 이름의 우주선을 만들고 오랜 혼수를 버틸 수 있는 유전자를 가진 과학자들을 선발해 우주로 보낸다. 소설은 우주선에서 홀로 눈을 뜬 그레이스가 기억을 찾고 지구를 위한 과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작가의 전작인 마션과 다른 점이 있다면 오롯이 혼자가 아니라 함께 문제를 해결해 가는 ‘동료’가 있다는 점이다. 물론 동료가 지구인은 아니다. 외계인이다. 흥미로운 점은 외계인의 외적인 모습이나 의사소통 방식, 살아가는 환경 등을 꽤나 구체적으로 묘사했다는 점이다. 매개체를 통해 소통하며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삼체> 속의 외계인과는 달랐다. 그 점이 이야기를 좀 더 흥미롭게 읽어갈 수 있었던 지점인 듯하다.
헤일메리는 편도 우주선이다. 다시 말해, 돌아올 방법이 없다. 이 우주선에 탄 과학자(혹은 우주비행사)들은 모두 자살 미션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놀랍게도 지구의 여러 과학자들이 자살을 하기 위해 지원했으며 그중 적합한 서너 명이 뽑혔다. 그리고 우리의 주인공 그레이스는 서너 명에 포함되어있지 않았다.
그레이스는 아주 나중에야 자신이 직접 자원한 것이 아닌 상급자에 의해 강제로 우주선에 태워졌음을 깨달았다. 소심하고 겁이 많은 그레이스지만 외계인-이름은 로키다-과 함께 미생물 감염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고 지구 그리고 외계인의 행성인 에리드를 모두 지켜낸다. 로키와 그레이스의 이야기는 꽤나 귀엽고 즐거우며 감동적이다.
마지막까지 모든 예상을 빗나가는 스토리에 신이 나서 줄줄 읽어나갔다. 소설이 마음에 들었던 가장 큰 이유는 주인공이 나와 다름없는 성격을 가진, 아주 현실적인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지구를 구하는 SF물의 주인공은 대부분 정의감에 사로잡혀있으며 자신의 목숨보다 지구의 안전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지 못할 테다. 나도 마찬가지고. 그레이스는 끝까지 살고 싶어 한다. 지구를 지키고자 하는 대단한 사명감이 있지도 않다. 다만 친절하고 호기심이 많았으며 착했다. 지금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들과 같이 말이다. 그 선량함이 700페이지에 가까운 이 이야기의 설득력을 부여한다. 그레이스의 모든 행동과 결정에 90% 동의하게 된다. 응, 나였어도 그랬을 거야. 하면서 말이다.
마션도 그랬지만 프로젝트 헤일메리 또한 낙관적인 분위기다. 물론, 상황은 낙관적이지 않지만. 작가 특유의 위트 있는 문체도 분위가 한몫한다. 책을 읽으면서 현재 삶에 대한 고찰과 반성 같은 것은 못했다. 당장 내 삶에 어떤 깨달음이나 교훈을 주는 책은 아니지만, 내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비현실적인 상황에서의 고민을 그레이스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꽤나 즐거웠다. 참, 영화화가 확정되었다는데 로키를 어떻게 구현해 냈을지 너무 궁금하다. 귀여운 로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