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쓰
"파리에서 런던으로 가는 브리티시 항공의 이코노미 클래스에 앉아있었다… 내 왼쪽 승객은 안전 지침 카드를 꼼꼼히 살피고 있었다… 짐을 챙겨서 세관을 통과했을 때 나는 이미 클로이를 사랑하고 있었다."
유럽 가기 직전에 서점에서 3장 정도 읽고, 파격적인 흐름에 눈이 뜨였다. ‘유럽 가는 비행기에서 혹시나 이런 운명적인 사랑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으로 책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내 옆엔 내 친구뿐이었지
1인칭 화자가 클로이라는 여자에게 비행기에서 첫눈에 반해서 썸을 타고, 사귀고, 행복하게 만나다가, 권태기가 찾아오고, 결국엔 이별을 하고, 이별 그 후의 상실감까지 사랑의 모든 과정을 담아냈다. 전개방식이 조금 독특한데, 화자와 클로이의 러브스토리를 중점적으로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철학적 이야기- 와일드, 하이데거, 헤겔, 마르크스, 니체, 칸트, 플라톤, 프로이트 등등-를 풀어낸다.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를 이야기하다가 그와 관련된 철학적 이야기가 나오고, 다시 소설로 흘러가다가 철학적 이야기가 나오고… 쉬웠다가 어려웠다가 이랬다가 저랬다가 냉탕 갔다가 온탕 갔다가,, 난 샤브샤브가 되,,,아무튼 나중에 다시 한번 봐야 할 것 같다. 철학적 이야기가 나오면 읽다가 자기도 했으니까… 나의 달콤한 수면제…★
이렇게 완벽한 사람이 나를 왜?
화자는 비행기에서 내려 클로이의 연락처를 받고 헤어진다. 근데 이 바보가 연락처를 받았으면 어디에 적어야지 외우면서 간다. 그러니 연락처를 까먹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음? 머리를 쥐어짜 내 필사적으로 기억해 내고, 기억나는 번호들을 조합해 전화해 보며 겨우겨우 클로이와 연락이 닿는다. 클로이와 밥을 먹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클로이의 마음을 얻기 위해 초콜릿에 알레르기가 있으면서도 좋아한다고 거짓말까지 했던 화자는 막상 클로이의 마음을 얻고 나니 마음이 살짝 식는다.
‘그녀의 웃음과 눈매, 유머 감각과 책을 고르는 취향, 불안과 지성이 내 이상에 기적적으로 맞는… 이렇게 완벽한 사람이 나를 왜?’라는 의문점과 함께. 알랭드 보통은 이 순간 ‘자기 사랑’과 ‘자기혐오’ 사이의 균형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사랑의 보답을 받게 됐을 때, 자기혐오가 우위를 차지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할 것이고, 자기 사랑이 우위를 차지하면,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이 부분을 읽을 때 소름이 끼쳤다. 누군가를 좋아하다가 막상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고 하면 매력이 반감되곤 했기 때문이다. 알랭 드 보통의 주장으로 본다면 나는 자기혐오가 더 큰 사람인가 보다. 나를 좀 더 사랑하고 자존감을 높여야지ㅠ 다들 외치십쇼 ⭐ 나는 짱이다⭐️
행복해서 두려워
통제할 수 있는 일들을 통해 얻은 행복, 일을 성취한 뒤에 찾아오는 행복은 받아들이기 쉽다. 하지만 화자는 클로이와 함께 얻은 행복은 우연한 만남으로 인해 생긴 것이기 때문에 우연히 또 떠날까 두렵기도 했다. 나 역시 행복할 때 두려움도 크게 느끼는 편이다. 이게 다 자존감이 낮기 때문인 걸까.. 아무튼 이 행복의 끝은 언제일까, 얼마나 지속될까, 하는 그런 마음들? 행복하지만 그 후에 찾아올 공허함 등이 가끔 힘들게 할 때가 있다. 그렇다고 연애를 하면서 가장 행복할 때 헤어지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 화자는 이 연애가 자연스러운 종말로
가기 전 끝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는 점은 약간 신기했다. 행복의 실험에 수반되는 불확실성과 위험을 견딜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이 행복이 언제 깨질까 불안하고 두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하는 것이 사랑 아닐까? 두렵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있으면 행복하니까!
사랑은 또 다른 사랑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클로이는 변했다. 1주년 여행은 장례식 같은 분위기였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클로이는 화자의 지인, 윌과 잤다는 이야기를 울면서 털어놨다. 배신한 여자는 울고 있었고, 배반당한 남자는 위로를 하고 있었다. 클로이는 이별 편지를 전해왔고, 그 안에는 구구절절 함께했던 추억들, 윌을 미워하지 말라는 개소리로 가득했다. 책 초반에 화자는 ‘필생의 사랑’은 다 살아보고 나서야 가능한 일이지만, 클로이를 만난 직후, 그녀를 필생의 사랑이라고 느낄 만큼 완벽했다고 했건만... 이런 필생의 사랑을 떠나보내고 화자는 완전히 무너
지고 만다. 게다가 자신의 지인과 바람이 나서 이별을 당했으니.. 나 같아도 무너짐… 그렇다고 해서 자살을 선택하려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거잖아ㅠㅠ 다행히 집어든 약통이 비타민이라서 다행이지,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할 뻔했음… 내가 첫 이별을 하고, 죽을 만큼 힘들었을 때, 가장 위로 안 되는 말은 ‘시간은 약이다’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깨닫게 되었다. 정말 시간이 약이었다는 것을. 죽을 만큼 사랑했던 사람과의 이별로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 같았던 날들도 결국 다 지나간다는 것을. 화자 역시 처음엔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클로이가 그렇게 가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고 거짓말을 되뇌며 살다 보니 살아졌다. 절대 잊히지 않을 것 같았던 추억들도 점점 희미해졌고, 다시는 사랑 같은 것 못할 줄 알았는데도 살다 보니 또 다른 설렘이 찾아왔다. 그래, 사랑은 또 다른 사랑으로 잊히기 마련이지.
"사랑은 행복과 기쁨과 설렘과 용기를 준다.
동시에 고통과 불안과 아픔과 슬픔과 절망과 불행도 준다.
그리고 그것들을 이겨낼 힘도 더불어 준다.
그 정돈 돼야 사랑이다."
_ SBS <괜찮아 사랑이야>
이 책을 읽으며 생각난 드라마 대사를 남겨본다. 화자와 클로이, 그리고 나는 고통과 불안, 아픔과 슬픔을 이겨내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생겨나겠지. 그리하여 진짜 사랑을 찾을 수 있겠지.
놀랍게도 알랭 드 보통이 이 책을 25살에 썼다고 한다. 25살에 이렇게나 사랑에 대해 잘 안다고..? 아주 떡잎이 대단한 친구구만. 33살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사랑도 연애도 잘 모르겠는데 말이지. 이 책을 읽으면서 대다수가 이렇게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나만 이렇게 찌질하게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한편으로는 위로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