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쓰
좋아하는 김애란의 신작이라 바로 읽어봤다. 소설은 지우, 소리, 채운의 이야기다. 홍학의 자리 이후 충격을 너무 먹은 나머지 이름으로 성별을 구별 짓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다행히 작가가 딸 혹은 아들, 남성, 여성 등의 표현을 통해 인물의 성별을 아주 명확하게 알려준다.(ㅋㅋ) 어쨌든 이 셋은 전부 동급생으로 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다. 그리고 저마다의 상황이 꽤나 어렵고 불안하다. 엄마를 잃은 지우,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를 교도소에 보내게 된 채운, 병상에 있던 엄마를 병이 아닌 사고로 잃은, 곧 죽을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을 갖고 있는 소리. 소설 초반에 지우와 채운은 자신의 반려동물(도마뱀도.. 동물인가..?)들에게 “세상에 우리 둘 뿐이야.”라는 말을 한다. 그리고 채운의 반려인 뭉치와 지우의 반려인 용식은 소설 말미에 모두 죽는다. 둘의 삶의 이유는 그들의 반려뿐인데… 뭉치를 잃은 채운은 엄마가 아닌 자신이 아버지를 죽였다고 자백할 마음을 먹고, 용식을 잃은 지우는 돌아갈 곳을 잃은 채 방황한다. 소리는 조금 특별하다. 어느 순간 자신이 죽을 생명체를 알아본다는 것을 깨달은 소리는 투병하는 엄마의 손을 매일 잡으며 엄마의 생사를 확인했다. 그리고 엄마가 사고로 죽은 이후, 엄마가 희미하게 보였으면 좋겠다(곧 죽을 사람이 희미하게 보임)는 생각을 한 것에 죄책감을 가지다 엄마의 무덤 앞에서 사과한다.
“극복이라는 게, 꼭 매 순간 일어나야 되는 건 아니에요.”
내가 인생작이라고 꼽는 드라마 중 하나인 <런 온>에서 오미주의 대사다. 이 소설을 모두 읽고 난 뒤에 이 대사가 불현듯 떠올랐다. 가족을 잃은 상실 속에서 작중 인물들은 모두 자신의 상황을 극복하려 노력한다. 영어공부를 하고, 그림을 그리고, 돈을 벌면서. 하지만 말처럼 쉽게 되지 않았고 저마다의 극복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나에게는 무척 애잔하게 다가왔다. 가끔은 극복하지 못해도 무너져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어른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불면증으로 고생하던 내게 못 자도 괜찮다고 말해주던 우리 엄마처럼. 지우도 소리도 채운
이도 그런 안정감을 경험했다면 조금 달랐을 텐데. 하지만 그들은 안정 하나 얻지 못하고 한 없이 추락했다. 푹신한 매트 하나 깔리지 않은 세상으로 떨어지며 세상의 높이와 깊이를 학습했다.
그건 그들의 의지가 아니었다. 세상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게 시련을 주고 슬픔을 주고 사랑을 주고 기쁨을 준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 기복의 파도 속에 서 잠기지 않기 위해 간신히 얼굴만 내민 채 숨을 붙이는 게 다였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이만큼이다.
그런 것도 성장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시간이 무척 오래 걸리는 데다 거의 표도 안 나는 그 정도의 변화도? 혹은 변화 없음도?
돌이켜보면 극복이나 성장처럼 거창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내 인생에 없었다.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고 무언가가 이겨지지도 않았고 고된 일을 헤쳐 나간다고 해서 마음의 넓이가 대단히 넓어지지도 않았다. 딱 반 뼘 즈음. 내 성장의 크기는 딱 반 뼘정도였다. 그마저도 없는 경우가 허다한. 극복이라기보다는 복귀에 가까운 그런 것들. 내 불면증도 그랬다. 어느 날 갑자기 훅 찾아와서는 내 뺨을 후려치더니 여태 내 옆에 달라붙어 떠날 줄을 모른다. 내가 해낸 것은 병원에 간 것. 약을 먹은 것. 그렇게 하루를 살아낸 것. 여전히 잠은 어렵고 밤은 불편하지만 그래도 침대에 누워 눈을 감는 것. 그래서 이 이야기가 좋았다. 뭔가를 완벽하게 극복하지 않아도, 성장이 아니라 정체라고 해도, 나아감이 아니라 돌아감이라도, 그것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근데 지금의 나는 좀 나아갈 필요가 잇는듯.. 운동 좀 해 일찍 좀 일어나 물 좀 마셔 은채야!!!!!!) 불면증이 내게서 완전히 물러난다 하더라도 언제고 또 다른 시련이 내 얼굴을 후려칠 테다. 결핍과 상실은 질투가 많고 행복과 안정은 중심이 없으니까. 그때가 되면 과거는 전부 잊히고 새로 경험한 아픔인 듯 고통스럽겠지만 그럼에도 나의 반 뼘을 기억하고 뒤로라도 걸어가는 것이 나름의 방법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아 머 암튼 작가는 가끔은 무너지고 넘어지고 돌아가도 괜찮다!!! 그 자리에 머무르는 것조차 성장의 한 부분이다!!! 이런 걸 전달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솔직히? 내가 지우였으면? 내가 채운이었으면? 모르겠네요. 애들이 고딩 답지 않게 정신력이 강합니다. 배워야 돼 이런 거.
가벼운 거짓말 무거운 진실
초등학교 4학년 때, 부모님이 이혼을 했다. 지금이야 결혼과 이혼이 연애와 이별처럼 쉽고 가벼이 여겨지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편부모’ 가정이라는 걸 숨기고 싶은 마음이 컸다. 아빠와 절연했던 잠깐의 시기에도 꿋꿋이 비상연락망에 아빠 연락처를 채워 넣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고 비로소 ‘베프’라는 게 생겨 나도 용기를 냈다. 웃긴 게 심지어 말로 한 것도 아니고 편지로 써서 고백했다 ㅋㅋㅋㅋㅋ 암튼 결론은 그 친구가 너무너무 놀라면서 나를 위로해 주는 바람에 되려 내가 놀래서 그냥 위장이혼이라고 거짓말을 쳐 비렸다 사실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내가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친구는 환하게 웃으며 놀랐다고 말했다. 사실 위장이혼도 아빠랑 연락을 하고 지내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냥 거짓말로 두는 게 더 편했다. 이혼이 거짓말이고 위장이혼이 사실인척 하는 게 더 쉽기도 했고. 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싶은 방향으로 더 쉽게 믿는 경향이 있으니까. 작가도 그 마음을 알았던 건지 자신의 속마음을 사실 속에 섞어서 마치 거짓말인 것처럼 드러낸다. ‘이중에 하나는 거짓말이야. 그러니까 내가 방금 한 말은 거짓말일 수도, 사실일 수도 있어. 뭐가 제일 거짓말 같아?’ 혹은 ‘나는 너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아. 그러니까 나한테 말해도 돼.’ 이런 형식은 작가는 채운이 아빠를 찔렀으며 아빠의 장례식에서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드러내고, 소리가 죽을 사람을 알아본다는 사실을 암시하며, 지우와 선호아저씨 간의 오해를 해소하는 데에 이용되었다. 이토록 솔직한 거짓말을 본 적이 있던가.
얼마 전 안희연의 산문집에서 “거짓의 쓸모”에 대해 다룬 글을 봤다. (독후감을 쓰기에는 내가 너무 싫어하는 의미부여 오지게 하는 에세이라 굳이 곱씹고 싶지 않았읍니다.) 거짓의 쓸모는 필요와 불필요로 구분 지을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나의 엄마는 어떤 행위나 물건을 쓸모라는 잣대로 판단하면 삶이 피곤해진다고 했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쓸모를 생각한다. 내가 일본어를 배우면 어디에 쓸모가 있을까. 지금 내가 가장 쓸모 있게 배울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이 신발은 나에게 쓸모 있게 신어질까. 돌아와서, 거짓에 대해 안희연은 이렇게 말했다. “어떤 거짓은 붉고 어떤 거짓은 서글프다. 어떤 거짓은 축축하고 어떤 거짓은 창백하다. 악랄하고 섬뜩한 거짓 앞에선 몸이 굳기도 할 테지만 귀여운 거짓 앞에선 사랑이 건너가기도 할 것이다”. 소설 속 세 인물에게 거짓말은 자신이 솔직해질 수 있는 단 하나의 기회였다.
그리고 그 기회가 이들을 성장할 수 있게끔 만들었다. 그것들은 아주 쓸모 있는 거짓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도 하나 퀴즈 <이중 하나는 거짓말>
나는 요즘 잠을 잘잔다.
나는 잠옷을 좋아한다.
나는 피아노를 배운 적이 있다.
나는 밤보다 낮을 더 좋아한다.
나는 죽여버리고 싶을 만큼 싫어하는 사람이 있었다.
뭐가 거짓말일지 맞혀보세요! 내 거짓말은 재미나 성장에 도움이 되는 쓸모 있는 거짓말은 아니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