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 한강

아쓰

by Poison After Feeling

(경) 한강 작가 노벨 문학상 기념 채식주의자 2독 (사)

채식주의자는 한강의 단편집이다. 대학생 때 처음 읽었는데 오래돼서인지 어떤 불편한 기분만 남아있고 잘 기억이 나지 않아 재독을 해보기로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당당히 제치고 첫 / 여성 / 아시아 작가로 선정된 한강 작가… 국뽕 미쳐버리잖아… 책을 읽으면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문장 하나하나 떠오르기 쉽지 않다. 대략적인 줄거리나 읽은 후의 감상만이 어렴풋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 ‘어렴풋한 감상’을 줄 수 있는 책은 대단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읽게 돼서 기뻐.


<채식주의자>


관습에 의한 관성


누구나 심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압박이 가해지면 스트레스를 받는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순 있겠지만 압박감에 시달려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거다. 브라도 우리 신체를 압박하는 장치다. 내 몸을 짓누르는 이 속옷이 기분 좋을 리는 없다. 예전에는 브라가 답답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던 거 같다. 물론 예전에는 와이어가 있는 브라가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오래 입어 해지고 닳은 브라는 와이어가 비틀어지고 속옷을 뚫고 나와 명치를 찌르곤 했는데 그 점은 많이 불편했던 거 같다. 그럼에도 십 대까지는 남들이 브라가 불편하다고 하는 데 크게 공감을 못 했던 거 같다. 잘 때도 브라를 차고 잘 정도였다. 20대가 되고부터는 이 브라가 꽤나 답답하게 느껴졌다. 어떤 이유에서 인진 모르겠으나, 아마 정말로 혈액 순환이 원활하지 않다 보니 느껴지는, 내 몸을 압박하는 브라, 심지어 팬티까지도 답답하게 느껴졌다. 이제는 와이어 있는 브라는 절대 하지 않는다. 두꺼운 상의를 입으면 브라는 하지 않고, 보통의 경우 캡이 내장되어 있는 캡나시를 입는다.


그렇다면 이 불편한 것을 매일매일 차고 다니는 이유는? 예쁜 모양을 유지하기 위해? 그런 여성이 얼마나 될까. 불편해도 어쩔 수 없이 이 속옷을 차고 다니는 이유는 사회적인 통념 때문일 거다. 그깟 브라 하나 안 찼다고 그 많은 악플에 시달렸던 설리만 봐도 알 수 있다. 유독 대한민국 사람들은 노브라에 지극히 보수적이다. 가슴을 다 까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그깟 유두 조금 튀어나온 걸 사람들은 절대로 용납 못 한다. 논리적으로,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진짜 이상한 일이다. 그럼에도 나 역시 노브라로 길거리를 뛰어다니지는 않는다. 어쨌든 두터운 옷이 아닌 이상 캡나시라도 입는다. 그렇다고 이 캡나시가 썩 편한 것도 아니다. 그 이유는 굳이 남들의 의미 심장한 시선을 받고 싶지 않아서다. 그렇게 우리는 별 수 없이 혹은 별 이유도 없이 가슴에 족쇄를 달고 살게 됐다.


심리적 겁탈


<채식주의자>는 꽤나 영리하게 쓰인 책이다. 매우 평범했던 아내, 너무나도 평범했던 아내는 어느 날 악몽을 꾼 뒤로부터 채식을 선언한다. 메말라 가는 주인공을 보며 가족이니 남편이니 하는 주변 사람들은 강제로라도 고기를 먹이려고 애쓴다. 나 역시 채식주의를 옹호하는 편은 절대 아니다. 채식하겠다는 사람 입을 억지로 벌려 고기를 집어넣지는 않겠으나, 본인이 채식할 생각은 절대 없다.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채식하는 사람이 곱게 보이지는 않는다. 내가 얼마나 강한 육식주의자 하면은… <옥자> 보고 나와서 육식이 잠시나마 역겹게 느껴졌지만 바로 곱창 먹으러 간 사람이다… 인간은 본래 잡식성 동물이고 육식은 인간의 본능이자 자연의 이치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건 나의 신념이다. 남에게 이걸 강요할 생각은 없지만 나와 다른 신념과 이념을 가진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게 불쾌감을 느낀다. 그렇기에 <채식주의자>에서 채식만 갖고 날 설득하려 들지 않았다는 점에서 영리하다고 느꼈다.


사람들이 보통 갖는 통념에 반하는 행위를 했을 때 주변에서 강압적으로 본인들의 사회적 통념을 강요하는 것을 채식뿐만 아니라 여러 모습을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중 하나의 장치가 ‘브라’다. 주인공은 브라를 하지 않는다. 지극히 평범한 아내의 평범하지 못한 하나의 특징이 바로 그 점이다. 그런 그를 사람들은 용납하지 못한다. ‘그래도 육식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정중하게 말하는 사람들이나 그녀를 붙들고 억지로 탕수육을 먹이는 가족들이나 다를 바 없다. 자신들의 사상과 이념을 남에게 강요하는 것은 어떤 형태든 정신적 고문이자 겁탈이다. 그의 남편은 더 이상 성관계를 갖지 않으려는 주인공을 억지로 붙들고 겁탈한다. 이 장면을 통해 원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욱여넣는 행위는 신체에 국한하지 않는다는 점이 강조된다.


내가 채식주의자들에게 본능적으로 혹은 학습적으로 불쾌감을 느끼는 것은 아직 어쩔 수 없는 거 같다. 가령 나는 동성 커플에게는 전혀 불쾌감을 느끼지 않지만 어떤 이들은 그 모습에 불쾌해하는 거처럼. 개인이 갖고 있는 관용도의 차이는 천차만별일 것이다. 다름과 차이에 대한 관용도를 올리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거의 본능 적으로 느껴지는 불쾌함을 반하는 일이니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은 적어도 티는 내지 말 것. 불쾌감을 숨기는 능력을 기를 것.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정신머리를 키우는 정도이지 않을까. 인간이라면 그

정도 노력은 하자.



<몽고반점>


와차차… 재독임에도 불구하고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었다. 이 책은 피카레스크식 구성으로 이뤄졌다. 완전히 독립적인 단편집이라고 생각해서 챕터를 하나 읽고 쓰고, 하나 읽고 쓰고 하려고했는뎁… 와차차… 다음 챕터인 몽고반점에서 동일한 인물들이 나온다… 하핳 맞아 맞아 그랬지… 채식주의자에서는 영혜의 남편 시점 위주로 서사가 진행됐다면 몽고반점에서는 영혜의 친언니의 남편 (형부)의 시점으로 서사가 진행된다. 둘 다 남자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삼신할머니의 아동 학대


신기하게도 파란 몽고반점은 동양인한테만 나타난다고 한다. 서양인의 경우 반점이 생긴다면 붉은색 반점이 생기고 그리하여 딸기상 혈관종(strawberry birthmark)라고 부른다고 한다. 한국 신화에는 몽고반점은 삼신할머니가 아이들을 출산시킬 때 엉덩이를 때려서 파랗게 남은 멍이라고 그려지고 있는데, 거참 조금 잔인하면서도 귀엽다. 어쩌면 우리의 삶은 폭력으로부터 시작되는 걸지도.


여러분은 몽고반점을 갖고 있는가? 대부분 사춘기 시기에 몽고반점은 사라진다고 한다. 나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팔뚝에 꽤나 큰 몽고반점이 있었는데, 어릴 때는 아주 선명한 하트 모양으로 초등학교, 중학교까지만 해도 꽤나 진하게 남아 있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었다. 어린 마음에 이 몽고반점을 얼마나 없애고 싶었냐면 강력 본드를 바르고 굳힌 다음에 떼어내서 표피를 뜯어낼 정 도로 싫어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진짜 미친년이네…)~~ 레이저 시술은 생각도 못 했던 나이기 때문에 꽤나 극단적으로 행동했다. 중고등학생 시절까

지도 남아있던 몽고반점을 보며 사람들은 종종 “어? 다쳤어? 여기 멍들었네”라는 말을 듣기도 했는데, 그러니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가… 성인이 되어서도 얼룩덜룩 희미하게 남아있는 몽고반점이 싫어서 그 위에 하트 모양의 타투를 새겼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타고난 상처 위에 내가 선택한 상처를 덮어쓰기 한 셈이다.


외줄 위의 외설 혹은 예술


비디오 아티스트인 그는 사회성 좋고 매사에 밝고 인내심 많은 아내(인혜)를 놔두고 그녀와는 대비되는 매력을 가진 처제(영혜)에게 성적인 흥분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 사건의 발단은 그의 아내가 그녀의 동생이 여전히 몽고반점을 갖고 있다는 말을 들을 후부터인데 어쩐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이미지가 그를 괴롭힌다. 처제의 몽고반점을 주변으로 꽃을 그리고 나체의 두 남녀가 결합하는 이미지. 이 이미지를 죽기 전에는 꼭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강박으로 굳혀질 정도. 결국 그는 저질러 버린다. 처제에게 나체로 자신의 비디오에 출연해 달라고 한 것.


일말의 양심이 있었던 그는 자신의 처제와 결합될 남자로 자신이 아닌 같은 작업실을 사용하는 후배로 정한다. 막상 촬영을 시작하자 점점 욕심이 많아진 그는 나체의 두 사람에게 갈수록 과한 요청을 하고 후배는 그런 요구에 질려버려서 나가버린다. 이후 결국 본인의 몸에 꽃을 그리고 처제의 집에서 처제와 결합해 버린다. (!) 다음날 영혜의 집에 왔던 언니 인혜가 그 모습을 목격하고 인혜의 신고로 그는 정신병동에 갇히게 된다.


<몽고반점> 편은 어쩐지 읽으면서 하루키 냄새가 났다. 일부 극성 보수 학부모가 학교에 <채식주의자> 배치 반대 운동을 했다는데… 뭐… 자극적이긴 하다. 형부가 처제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끼는 부분이 특히나 믱읭스럽고… 정말로 저런 욕망을 품어 본 사람들이 많을까?라는 의문도 들기도 하고… 나한테 자매가 없음에 감사하게 되는…


<나무 불꽃>


전반적으로 세 개의 중편 소설은 시간 순으로 흘러간다. 이번 편은 <채식주의자> 영혜의 언니 인혜의 시점으로 서술된다. 즉, <몽고반점> 서술자 인호의 아내다.


삶을 참아내는 사람


인혜의 삶을 보면 진짜 비참해서 내가 다 마음이 너무 아프다. 사회성 좋고 장사 수완도 좋은 그녀는 밥벌이도 못 하는 남편 인호를 대신해 돈도 벌고 애도 돌본다. 그녀는 올곧은 신념을 갖고 다소 딱딱하게 살아가는 동생과 달리 사회에 동화되는 법을 어릴 때부터 터득했다. 아버지한테 맞기 싫어서 아빠의 밥상을 차리기도 한다. 그렇게 그녀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하는 일을 하고 살아왔다.


영혜와 인혜는 둘 다 마음속에 무언가를 꾹꾹 억누르고 살아온 사람들이다. 다만 영혜와 달리 인혜는 그런 억압에 내성이 있었을 뿐. 영혜와 남편이 나체로 있는 모습을 본 인혜는 정신병원에 연락해 두 사람을 입원시킨다. 이후 자연스럽게 인호는 퇴원하고 집을 떠나고, 영혜는 그날 이후 증상이 더 나빠져 정신병원에 홀로 남겨진다. 이 와중에 본인이 영혜를 가뒀다는 죄책감을 갖고 모든 가족이 등 돌렸음에도 끝까지 혼자 영혜를 돌보는 사람이 인혜다. 영혜는 이제 자신이 나무가 되겠다면서 아예 음식을 먹지 않는다. 물과 햇빛만 있으면 된다면서 식음을 전폐한다. 그런 영혜를 어떻게 해서든 살리고 싶어서 바리바리 음식을 싸가도 영혜는 먹지 않는다.


K 장녀 - 미쳐버리는 게 오히려 속 편할지도


영혜는 참다 참다 미쳐버려서 경계의 저 편으로 떠나버린다. 모두가 떠난 그곳에 인혜는 홀로 남는다. 본인 스스로도 세상을 떠나고 싶어 죽을 생각도 해보지만 혼자 남겨질 자식 생각에 죽지도 못한다. 그녀를 끝까지 붙드는 건 책임감이다. 혼자 남겨질 동생, 혼자 남겨질 자식을 생각해서 죽지도 못한다. 그의 삶의 주체는 그가 아닌 책임감과 의무감이다.


한국의 바틀비: 고기를 먹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채식주의자> 속 남자들은 하고 싶은 건 다 한다. 자신의 모든 욕망에 충실하고 상대방의 동의도 없이, 설령 상대방이 싫어한다고 해도, 자신의 욕구를 강행한다. 반면에 여자들은 꾸역꾸역 참아내기만 한다. 참아낼 뿐 아니라 상대방의 욕구 표출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하고 싶은 건 하지 못하고, 하기 싫은 건 할 수밖에 없다. 개 같다…


책을 읽으면서 저번에 읽은 <필경사 바틀비>가 생각났다. 일하지 않는 편을 택하고, 먹지 않는 편을 택해서 종국에는 죽어버리는 우리 바틀비. <채식주의자>의 주인공과도 닮아있다. 그녀는 고기를 먹지 않는 편을 선택하는 것을 시작으로 식음을 전폐한다. 현대사회에서 삶을 가장 주체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은 결국 죽음을 선택하는 것일까? 무엇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인생에서 죽는 것조차 그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식음을 전폐한 순간에도 그는 정신 병원에 갇혀서 억지로 영양분을 공급받아야만 했다.


관성에 이끌려 그냥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상이라고 느낄 때가 많다. 그 삶에서의 나의 자율성은 얼마나 있는가. 내가 얼마나 주도적으로 삶을 끌어 나가고 있는가. 살아가는 주체가 내가 아니라 삶에게 주도 당해 끌려가고 있지는 않는가.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하기 싫은 일에는 단호하게 ‘싫다’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싫은지 않은지도 잘 모르겠다. 살아가는데 우리에게 선택지가 많이 주어지는 건 아니다.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고 해야 한다와 아니다의 문제인 경우가 많다, 혹은 그렇게 느껴진다고 해야 되려나. 우리는 하기 싫다고 안 해버리는 사람들을 포용할 정도로 너그러운 사회에 살지 않는다. 당연한 권리인 연차나 휴가에도 마땅한 이유가 없다면 눈초리를 받곤 한다.


그렇다고 경계성 지능 장애 있는 사람 마냥 그런 관념을 다 깨부수고 내 멋대로 살고 싶다는 건 아니다. 나는 쫄보인 걸…


스스로를 가두는 이런 무시무시하고 두터운 사회적 약속 때문에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눈살이 찌푸려진다. ‘넌 왜 멋대로 울타리를 깨부수고 돌아다니니?’ 예전에는 그런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싶어서 일부러 하지 말라는 건 다 하고 다녔다. 고등학생 때 기숙사에서 학교까지 가는 길에 운동장을 가로질러 갈 수 없었는데, 그런 말을 들으면 오히려 운동장으로 가로질러가곤 했다. 그 모습을 본 후배 한 명이 “그래도 규칙은 지켜야죠”라고 단호하게 말했는데 그 말이 엄청 깊게 각인됐다. 아직까지도 그 말이 신경 쓰여서 규칙이 있다면 최대한 지키며 살아가려고 한다. 어쩌면 그 사소한 사건이 점점 커져서 지금의 꽉 막힌 내가 됐을지도. (그렇다고 준법정신 철저한 사람은 또 아님, 여전히 하지 말아야 할 거 많이 함) 여기서 말하는 규칙이라 함은 사회에서 평범하게 혹은 옳다고 생각되는 쪽으로만 행동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타투는 그 생각이 이만큼 커지기 전에 자유로운 내가 했음)


지금의 나는 조금 더 살아가기 편한 거 같다. 조용하고 무던하게 살아가는 것. 그렇지만 조금 그립기도 하다. 남들 시선에 조금 더 자유로웠던 그때는 하고 싶었던 말도 더 많았던 거 같다. 이제는 더 이상 하고 싶은 말도 없다. 어쩌다 이렇게 쫄보가 됐나 몰라. 용기를 내 나 자신. 뭐가 그렇게 두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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