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쓰
"그래도 재미있어. <면도날>은 세 번이나 읽었어. 그 소설은 대단한 작품은 아니지만 잘 읽혀. 그 반대보다는 훨씬 낫지." -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 무라카미 하루키
하루키 오빠 말만 믿고 고른 서머싯 몸의 <면도날>. '잘 읽힌다'는 말은 맞았지만... 조금 길긴 긴데...? 서머싯 몸은 아무래도 <달과 6펜스>라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나 역시 그의 전작으로 읽은 유일한 책이 <달과 6펜스>였는데 화가 고갱의 일대기를 스트릭랜드라는 인물로 재창조해 마치 그와 우연히 알게 된 한 인물이 그의 일대기를 관찰하듯 서술하고 있다. 서머싯 몸과 폴 고갱이 동시대 사람인 걸 생각해 보면 그 당시에 꽤나 특이한 시도였을 거로 보인다. (폴 고갱이 서머싯 몸보다 형이지만...) 가령 내가 지드래곤을 만나서 이창현이라는 가명으로 그의 일대기를 쓰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내 왼쪽 손에는 달 모양 타투가 있다. 이 타투가 <달과 6펜스>를 읽은 뒤 한 타투였는데, 나름... 그 당시에는 '꿈을 꾸는 사람으로 살자'라는 의미를 담아서 했더란다.
<면도날>도 <달과 6펜스>와 거의 동일한 형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심지어 화자가 <달과 6펜스>의 화자와 동일하다. 초반에 <달과 6펜스>라는 저서로 유명해졌다는 내용이 직접적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달과 6펜스>로 유명세와 돈을 꽤나 얻은 화자는 이번에 엘리엇, 이사벨, 그레이, 래리, 수잔 등의 인물을 만나면서 그들의 삶을 관찰하며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러한 이야기 전개는 영화 <킬유어달링>을 떠오르게 한다. 작가들은 재미없는 인간들이지만 그들의 주변에는 항상 재밌는 사람들이 있고 작가들은 그저 그 이야기를 맛나고, 생생하게 전달하는 재능이 있는 것일 뿐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서머싯 몸이 굳이 이런 이야기 전개를 고집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생동감에 있지 않나 싶다. 가공의 인물들이 어떤 사건에 얽혀 나아가는 것보다는 자신이 만난 어떤 인문들이 이러한 일을 겪었다고 전하는 방법은 아무리 픽션이라는 것을 알고 보더라도 어쩐지 다큐멘터리같이 생생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평생 일 안 하겠다는 차은우 VS 돈미새 전현무
아무래도 올해의 책은 <필경사 바틀비>로 정해야겠다. 미국을 배경으로 쓰인 고전에 가까운 책들을 보면 <필경사 바틀비>가 자동적으로 떠오른다.
<면도날>에는 꽤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주요한 줄기를 이루는 주요 인물 래리, 그레이, 이사벨을 먼저 소개하겠다. 래리는 평생 일 안 하겠다는 차은우, 그레이는 돈미새 전현무다. 이사벨은 래리를 열렬히 사랑했지만, 래리가 자신은 일을 안 하겠다고 우기자 돈미새 전현무 그레이와 결혼한다. 앞서 <필경사 바틀비>를 언급한 이유는 바로 래리라는 인물 때문이었다.
래리는 잘생긴 외모에 16의 나이에 해군에 입대해서 전투기를 타고 전쟁에 나갔다가 동료의 죽음을 목격한 뒤 본국으로 돌아와서는 여기저기 들어오는 입사 제안을 모조리 거부하고 자신은 여행을 다니며 일은 하지 않고 살겠다고 고집을 피워 모든 사람들의 걱정을 산다. 사람들은 미국은 기회의 땅, 황금의 나라라며, 미국에서 일을 하지 않으며 살겠다는 생각은 말도 안 된다, 돈을 벌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라며 꾸짖는다. 사람들의 만류에도 그는 그 유명한 인자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삶을 살겠다고 선언하고 여러 나라를 떠돌며 현자들을 만나고, 삶에 대한 고찰을 하며 살아간다.
이사벨은 또 다른 주요 인물 중 한 명인 엘리엇의 조카딸로 래리를 사랑하지만 도저히 샤넬 드레스를 포기할 수 없어 투자 회사 사장의 아들인 그레이와 결혼한다. 끝까지 래리에 대한 사랑을 놓지 못하지만 그레이와 결혼해 나름 딸도 두 명 낳고 그토록 좋아하던 샤넬 드레스나 고급 저택과 인테리어를 포기하지 않고 살아간다.
그레이는 커다란 체격에 래리와 절친한 친구이자 이사벨을 열렬하게 사랑한 남자로, 투자 회사를 물려받아 본인이 사장이 되지만 미국 경제 불황으로 단숨에 파산을 하고 한동안 극심한 두통에 시달리며 일을 쉬지만, 엘리엇의 경제적 도움으로 끝까지 이사벨과 가난하지 않은 삶을 살아간다. 갈수록 머리는 벗겨지고, 살이 찌고, '늘 상투적이고 진부한 표현을 자신이 처음 생각해 낸 것처럼 내뱉곤 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친절하고 정직하며 믿음직하고 겸손한' 사람이다.
래리의 면도날
어떤 사실 또는 현상에 대한 설명들 가운데 논리적으로 가장 단순한 것이 진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원칙을 의미한다. 건전한 추론을 위한 방법론으로서, 단순성의 원칙 또는 논리 절약의 원칙으로도 지칭된다.
- 오컴의 면도날
이 중에서 가장 삶을 열정적으로 살아간 사람을 꼽으라면 당연 래리다. 이사벨은 래리를 사랑했지만, 일을 하지 않겠다는 그를 견디지 못해 차선인 그레이와 결혼했고, 그레이는 일하는 것에 목을 매며 살아갔지만 결국 이사벨 가문의 원조가 없었더라면 다시 일에 복귀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아름답고 우아한, 두 남자의 사랑을 받은 이사벨이 위너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그녀는 결국 래리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을 자신의 안락한 삶을 이유로 포기해 버렸으니... 가장 주도적으로 자신의 삶을 산 건 단연코 래리라고 할 수 있겠다.
'일하지 않으며 사는 사람은 사람답게 사는 게 아니다.'라는 조롱의 말을 들으며 산 래리이지만, 가장 자신이 열망하던 삶을 살아간 것이 래리라는 아이러니가 참 웃기다. 결국 진정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조소 섞인 조롱에도 기꺼이 웃으며 나아갈 수 있는 용기와 확신을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나의 삶을 비추어 봤을 때 나는 이사벨과 가장 비슷한 방향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나 싶다. 언젠가 한번 대학교 시절 영화 동아리를 같이 하던 언니와 변영주 감독님과의 GV 이후 이런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변영주 감독은 영화를 하기 위해서 여자로서 기대되는 많은 것들을 포기했다고 했다. 그는 화장도 하지 않고, 본인을 꾸미지도 않았으며, 영화 외에 물질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우리 둘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둘 다 자극을 받아 동기부여를 얻기보다는 상념하고 포기하는 법을 배워버렸다. '나는 저렇게 살 자신이 없다.' 아마 우리는 그만큼 열렬하게 영화라는 것이 하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다. 반면에 영화를 하기 위해서 그 많은 것들을 굳이 포기할 필요가 있나라는 생각도 했지만, 진실은 모두가 알고 있다. 진정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는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라는 것을. 그 무엇도 포기하지 않고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사람들은 그저 그런 정도의 사람으로만 남을 뿐이지 결코 위인을 될 수 없다는 것을.
열렬하게 무언가를 원하지 않은 것이 먼저인지, 그 얕고 표면적인 물질적인 것들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먼저인지 모르겠다. 이사벨이 추구하는 삶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다. 물질적이고 표면적인 것들은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빛을 잃게 된다. 젊은이나 사교 생활도 마찬가지다. 엘리엇은 죽기 직전까지 성대한 사교 파티에 초대받지 못한 것에 큰 원한을 품다가 세상을 떠난다. 그가 마지막까지 열망하던 것은 사교 파티에 참석하는 것이었다. 무엇을 위해 삶을 살아가는가에 대한 문제를 조금만 생각해 보더라도 이따위 명품 옷이나 인맥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내가 숨 쉬며 살아가는 이 물리적인 세상에서 살다 보면 진짜로 중요한 것들은 정작 조금도 생각하지 않게 된다. 물론 삶에 대한 가치에 정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조금 떨어져 생각해 봤을 때 나 자신이 조금은 덜 초라하고 불쌍한 삶을 살아가야 되지 않을까. (오늘도 역시나 아주 잠깐의 뉘우침과 자기반성으로 끝을 내본다...)
하루키 형의 말처럼 분량은 꽤 많지만 쉽게 읽히는 책이었다. <달과 6펜스>보다 평가절하되는 경향이 있는데, 읽은 지 오래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면도날>도 가볍지만 밀도가 낮은 책은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개인적으로 더 묵직하게 다가온 책이었다. 다루지 않은 다른 인물들도 많이 등장하는데, 개인적으로 이들의 서사보다도 더 재밌는 일화들이 많았다. <미드나잇 인 파리>를 재밌게 본 사람이라면 좋아할 만한 바이브. 존재론적 위기를 겪는 현대인들에게 추천해 주고 싶은 책이다. 1
1 최근에 가장 많은 생각과 고민을 했던 주제가 열정과 소비여서 그랬는지 정말 와닿는 글입니다.. 돌아보면 저도 열렬히 무언가를 하고 싶었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전생처럼 희미해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그곳에 돈과 열정을 소비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늘 하면서도 습관적으로 쇼핑 어플에 들어가고 단순히 사고 싶은 걸 갖기 위해 돈을 버는 모습들에 스스로가 환멸날 때가 많은 것 같아여 그만큼 사랑하는 게 없어서인지 아니면 사랑하는 게 너무 많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요
다만 실천하지 못하더라도 고민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아주 조금이라도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마음이 동하는 책이네여 요것도 읽어보겠습니다 히히 - 채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