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있는 요일 - 박소영

채쓰

by Poison After Feeling

습관처럼 인스타그램에 들어가 피드를 죽 내리다 한 문장을 발견했다. 곧장 네이버에 들어가 이 문장을 고대로 검색했다. 그리고 나온 검색 결과가 이 책이었다. 집 앞 도서관 홈페이지에 들어가 이 책이 있는지 찾았다. 구매를 해도 되었겠지만, 그냥 빨리 읽고 싶었다. 다행히 대출이 가능한 상태였다. 그날 퇴근하면서 도서관에 들러 이 책을 빌렸다.


이 책에 대해 쓰려면 간단한 줄거리 설명이 필수적이다. 이 소설에서 인간은 1인 1 몸이 아니다. 고도화된 기술과 인공지능 로봇에 일자리를 빼앗긴 인간들은 쓸모를 잃었고, 범국가적으로 인간 7부제가 실행되었다. 하나의 몸에 일곱 명의 인간이 살고 있으며 태어날 때부터 부여받은 요일을 기준으로 ‘월인’, ‘화인’등으로 살아간다. 7일 중 하루만 온전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고 나머지는 데이터로 존재하면서 낙원이라는 가상현실에서 존재한다. 물론 예외는 존재한다. 만 17세 미만의 인간,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 임신부, 36개월 미만의 아이를 키우는 양육자 그리고 ‘환경부담금’을 내면서 살아갈 정도의 재력을 가진 자. 배경 설명은 여기까지다. 이제 작중 인물들에 대해 설명해야 하는데, 워낙 많은 인물이 존재하고 그 관계가 촘촘히 연결되어 있어 핵심 인물 3명만 간략하게 요약했다. 주인공의 이름은 현울림. 현울림은 ‘수인(수요일 인간)’이다. 울림은 소설 초반에 죽는다. 아니, 살해당한다. 같은 몸에 살고 있는 바디메이트 ‘화인(화요일 인간)’ 강지나에게. 울림과 지나의 악연은 아주 길다. 지나는 내내 울림을 죽여버리고 싶어 했고, 물을 무서워하는 울림의 특성을 이용해 스쿠버 다이빙 직전에 몸을 바꿔 울림을 죽인다. 울림은 지나에게 복수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그 과정에서 과거 자신이 좋아했던 강이룬의 모습을 한 무재(무국적 중개인, 무국적자는 인간 7부제를 거부하고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간다.)를 만난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뭐.. 뻔하다면 뻔하고 신선하다면 신선할, 그런 이야기다. 증오하고 사랑하고 울고 웃고 그런 이야기.


가난한 자여, 쓸모없이 살아있지 말고 그저 데이터로 존재하라.


얼마 전, 성원감독님이 AI로 대체될 수 없는 기술에 대해 이야기하신 적이 있다. 회계사, 마케터, 교사, 금융업 종사자 등을 포함해 내가 속해 있는 미디어 직종까지 모두 AI가 쉽게 대체할 수 있다고 일컬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에 3D 프로그램을 열심히 배웠는데 AI에게 명령하니 약 3분 만에.. 내가 30시간을 작업해야 나올 수 있는 결과물을 턱 내놓았다. AI가 인간을 몽땅 실업자로 만드는 것은 어쩌면 머지않은 미래일지도 모른다.


대단히 슬프고 잔인하게도 자본주의 세상에서 직업을 잃은 인간은 쓸모도 함께 잃는다. 직업이 없어도 안정적인 수입이 존재하는 특수한 케이스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설정이 마냥 허무맹랑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생산활동을 할 수 있는 인간보다 그렇지 않은 인간이 계속해서 늘어난다면, 그들의 지적 자원은 살려두되 신체적 자원은 줄이는 것이 효율적이니까. 커다란 몸뚱이를 다 버리고 뇌로만 살아가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니까.


소설 속 환경에서 살아간다면 나 역시도 7부제를 면하지 못하고 나의 바디메이트들과 7일을 공유하며 지냈을 거다. 내게는 환경부담금을 내줄 수 있을 만큼 근사한 집안도, 스스로 환경부담금을 낼 수 있는 직업을 가질만한 명석한 두뇌도, 누군가에게 정자를 기증받아 임신으로 7부제에게서 벗어날 용기도 없다. 나는 무슨 요일의 인간이었으려나 생각하다 문득 월요일 인간이 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필연적으로 싫어할 수밖에 없는 월요일을 사랑할 수 있게 되려나. 1 돌이켜보면 내가 꼭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없다. 그건 내가 꼭

사라져야 하는 이유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내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 사라져야 하는 이유가 직업, 돈, 효율 따위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슬프게도 그런 세상이 벌써 시작된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이 세계가 굴러가는 방식


울림은 오프라인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사랑한다.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고 모든 게 어렵고 그래서 귀중한.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에 공연히 슬퍼하면서도 여전히 온전히 실체로 살아가길 바란다.


노력은 쉽게 틀어지고 간절한 바람은 가볍게 짓밟힌다.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으며 아름다운 것은 찰나의 순간. 사랑하는 것에도 반드시 끝은 있다. 오프라인에서는 사랑뿐 아니라 모든 게 금방 끝났다. 그래서 모든 게 귀중했다. 노을은 다음 수요일에 또 볼 수 있지만 오늘과 같지 않다. 벚꽃과 새순을 다시 만나려면 일 년을 기다려야 하고, 보드랍게 쌓인 눈을 가장 먼저 밟으려면 부지런해야 한다. 반면 낙원에서는 사람의 목숨마저 영원할 수 있다. 낙원에서는 부단히 노력하고, 간절히 바라고, 결국 실패하는 일이 잘 없었다. 뭐든 쉬웠고, 그래서 뭐 하나 굉장하지 않았다.


아마 울림은 희소성과 인내에서 오는 성취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던 것 같다. 뭐 하나 쉬운 게 없어서 해내면 굉장하게 여겨지는 그런 순간들 말이다. 나도 일주일에 하루만 현실을 살아갈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들의 소중함을 깨닫게 될까. 현실의 나는 병적으로 성취를 추구한다. 시간조차 낭비하지 않는 삶을 소망한다. 성취의 기준은 점점 높아지고 나는 계속해서 부족해진다. 현울림은 이것도 기꺼이 사랑하려나. 현실의 나와 현실의 울림을 비교해 볼 때마다 나의 낙원은 어떤 모습일까 생각했다. 지금 내가 낙원에 간다면? 일본인을 만나 일본어 공부를 하고 수영을 하고 잠을 자겠지. 현실에서 못다 한 성취를 이루려 안달일듯하다. 나는 낙원에서도 성취를 쫓는 중독자가 될 것만 같다.


울림은 현실에서 BGM처럼 깔리는 풀벌레의 울음소리까지 사랑했다.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히 존재하는 것들의 귀중함을 알았다. 그래서 하루하루가 귀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울림은 그냥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사랑이. 다시 오지 않을 오늘에 대한 사랑이.



Love wins 결국 사랑이 다 이겨


배경이 좀 특이해서 그렇지 이 소설은 단연 로맨스 소설이다. 남녀 주인공의 사랑뿐만 아니라 엄마와 딸의 사랑, 친구들 간의 사랑, 마을 사람들과의 사까지. 이 소설을 통달하는 하나의 주제는 사랑밖에 없다. 울림은 이룬 이 죽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이론을 데리고 한강에 갔고 자전거를 탔고 영화를 보러 갔고 수학 문제를 알려달라고 했다.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나서 죽었어야 하는 죽는 게 나았을 울림을 살게 하는 건 무재였다. 그 둘은 서로를 통해서 이 모든 걸 계속 딛고 이겨 나갈 힘을 얻었다. 나는 사랑에 아주아주 진심인 사람이라 둘의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알록달록한 띠지를 무수하게 붙여나갔다. 내 띠지가 붙은 몇 가지 문장은 아래와 같다.


울림은 무재가 감이 룬의 얼굴을 하고서 이렇게 죽을 것처럼 보이는 게 무서웠다. 누군가 울림의 심장을 반으로, 그리고 또 반으로 계속 접어 대는 느낌이었다.


네가 나를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오랜 시간 내가 너를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랐다.

나의 고장 난 뇌가 강이룬은 잊어도 현울림은 기억할 수 있기를 소망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그렇다고 굳이 내가 좋아하는 색으로 준비할 필요는 없잖아. 정말 굳이.” 항상 이런 식으로 괜히 사람 헷갈리게. 울림이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알면서 해 주지 않을 이유도 없잖아. 굳이.”


"이룬 아.”
"응. 어떻게 해 줄까.”
"언제든 나를 버려도 돼. 원망 안 해, 절대로.”



기억을 잃어가는 이룬은 자신보다 울림을 더 오래 기억할 수 있길 바랐다. 모든 걸 기억해야만 하는 억압 속에서 유일하게 기억하고 싶은 게 울림이었다. 그리고 기억을 잃어가는 자신을 보며 울림이 아프지 않기를 누구보다 행복하고 당당하게 살아가기를 바랐다. 그래서 울림을 도왔다. 증오는 절대 사랑을 이길 수 없다. 울림은 복수는 성공할 수 없었고, 이론의 복수는 성공할 수 있었다. 울림의 복수는 지나에 대한 증오였지만, 이론의 복수는 울림에 대한 사랑이었기 때문에.


뭐.. 둘의 사랑이 영원하진 않을 거다. 앞서 울림이 말했듯 현실에서 영원한 건 없고 특히 사랑 같은 건 인생의 찰나에 불과하니까. 같은 이유로 결혼제도에 동의하지 않았던 시절도 있었다. 영원하지도 않을 찰나의 감정에 평생을 맹세하는 건 미친 짓이라고 생각해서. 지금은.. 영원하지 않을 걸 알아도 영원할 거라고 믿고 싶은 게 결국 사랑이라서, 영원하지 않더라도 영원하자고 다짐하는 게 낭만이라서, 그것들이 때로는 우리의 삶을 더 따뜻하게 만들어주기도 한다는 걸 알아서, 그때와는 조금 다른 생각이다.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느라 오

늘 어치의 행복을 놓치기에는 우리가 맞잡은 온기가 너무 소중하니까. 그래서 울림은 둘의 이야기가 마침내 자신에게만 남게 되는 순간이 오더라도 이룬과 함께 이길 선택 했다. 부디 그들이 맞잡은 손의 온기가 오래 지속되길 바라면서 책을 덮었다.


작가는 생김새나 기억과 같은 ’나’를 이루는 연속성이 깨졌을 때도 내가 여전히 나일 수 있는 방법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에 있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이 글을 썼다고 했다. 울림과 이룬 이 서로에게 그 방법이 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 묘사되는 나는 실제보다 더 그럴싸할 거라고. 생각해 보면 내가 가장 ‘나’ 다운 순간은 가족과 함께 할 때,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그리고 애인과 함께할 때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어리광을 부려고 달래줄 수 있고 잔뜩 흥이 올라 길거리에서 춤을 춰도 받아줄 수 있는 사람. 날 닮은 그 사람과 그 사람을 닮은 내가 이어질수록, 서로의 경계가 불분명해질수록 서로가 서로의 취향이 되어주고 실체가 되어준다.


우리 많이 사랑합시다!





1 흥미로운 설정, <월요일이 사라졌다> 생각남... <독토에서도 얘기함. 월요일을 사랑하고자

하는 채쓰 귀여움 - 아쓰

2024.12.20.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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