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크와 맥주 - 서머싯 몸

아쓰

by Poison After Feeling

정말 좋아하는 영화가 하나 있는데 바로 짐 자무쉬의 <커피와 담배>라는 영화다. 이 영화가 주는 분위기나 연출이 마음에 드는 것도 있지만 사실 무엇보다 좋아하는 건 이 영화의 제목이다. 종종 그런 경우가 있다. 작품 자체보다도 제목에 이끌리는 작품들. 나에게 그런 경우는 <커피와 담배>,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그

리고 <케이크와 맥주>가 있겠다.


커피와 담배 그리고 케이크와 맥주


'커피와 담배'는 희한하게 듣기만 해도 어떤 이미지가 떠오른다. 짐 자무쉬의 영화를 봐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떨리는 손, 빠르게 움직이는 눈동자, 불안함과 초조함이 느껴진다.

혹은, 흥미롭게도, 정반대의 이미지도 떠오른다. 차분하게 고채도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서 한껏 분위기 잡은 표정으로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피우는 형사의 이미지가 떠오르기도 한다.

커피와 담배를 동시에 즐기는 혹자는 '커담똥'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커피와 담배는 (과학적으로 증명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배변 활동에 아주 크게 도움이 된다.

반면, 케이크와 맥주라는 이미지는 단번에 떠올리기 쉽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케이크와 맥주를 함께 즐기지는 않으니깐... 여러분들은 케이크와 맥주 하면 어떤 이미지가 연상되는가?

책의 존재를 알고 곧장 책의 이미지를 보게 됐는데 이후로 '케이크와 맥주'를 떠올리면 책의 표지로 쓰인 Rachel Campbell의 이 그림이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표지에서는 좌상단의 여자 얼굴이 완전히 잘려있는데 의도였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보니 작중 인물 중 로지가 나이 들고 이중턱이 된 모습같이 보이긴 한다.) 텍스트와 이미지가 결합하면 이렇게나 시너지가 크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어떤 말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이미지가 연상되니 말이다. 그리하여 '케이크와 맥주'는 나에게 내가 좋아하는 파스텔 풍의(고채도 x) 먹음직스러운 디저트 이미지로 각인됐다.

케이크와 맥주가 책에서 의미하는 바는 <십이야>에서 설명한 바 있듯 삶의 유희와 쾌락을 뜻한다. 더 구체적으로 이 책에서는 작중 인물 중 한 명인 로지의 인생을 비유하는 데 사용된다.


XOXO, 가십걸


서머싯 몸의 소설은 대체로 비슷한 구조와 양식을 띤다. (적어도 내가 읽은 책 들은 전부 같은 형식으로 이뤄졌다.) 자전적인 이야기를 1인칭 시점으로 서술하는데 서머싯 몸의 가장 큰 장기는 인물 묘사와 돌려 까기인 거 같다. 그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가십 지를 읽는 기분도 들고, 고도로 남의 험담을 잘해서 불편하지만 계속 친하게 지내고 싶은 친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책의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책이 출간될 당시 많은 작가들이, 특히나 인물이 자신을 특정하고 있다고 느낀 작가들(에드워드 드리필드 - 토머스 하디 / 앨로이 키어 -휴 월폴)이 적지 않은 우려와 불만을 표했다고 한다. 나였으면 서머싯 몸이랑 친구 하기 무척이나 두려웠을 듯.


이 책에서도 꽤나 다양한 인물들이 나오지만, 극의 흐름상 중요한 인물들 위주로만 서머싯 몸 스타일로 소개해보겠다.


화자 어셴든(서머싯 몸)은 그다지 성공한 작가는 아니지만 의대를 다니며 꾸준하게 글을 쓰며 작가 생활을 했다. 귀한 출신의 그는 어릴 적 목사인 헨리 숙부가 지내는 블랙스터블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방학 기간을 보내곤 했는데, 그의 숙부 가족은 고지식한 스타일이라 천한 출신의 사람들을 무시하곤 했다. 예를 들어 조지 켐

프는 블랙스터블에서 잘 나가는 상인이었는데, 아무리 교회에 열심히 나가고 기부를 많이 해도 숙부는 그를 무시하곤 했다.


어셴든 역시 그런 숙부의 영향 아래에 평출인 그가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잘난 체하고 다니는 꼴이 아니꼽게 느껴졌지만 예의를 갖추고 그를 대하려고 노력했다. 어셰든은 또한 블랙스터블에서 인상 깊은 커플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작가 에드워드 드리필드와 그의 아내 로지였다. 어셰든은 자전거 타는 법을 그들에게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친분을 쌓게 되었다. 그들 역시 천한 신분 출신 1로 숙부가 그들과 어울리는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으나 어셰든은 숙부 몰래 그들과 만나며 깊은 인연을 쌓아갔다.

세월이 지나 에드워드 드리필드는 유명한 거장 작가가 되었고, 그 사이에 로지는 블랙스터블에서 부도가 나 달아난 켐프와 미국으로 도망을 가 재혼했다.

앨로이 키어는 어셰든의 작가 친구인데, 드리필드가 죽은 후 그의 미망인의 부탁으로 드리필드 전기를 쓰게 된다. 앨로이 키어는 글 솜씨보다는 말솜씨와 사교 스킬이 훌륭한 작가다. 그는 어셰든이 드리필드와 어릴 적 친분이 있는 것을 알기에 그에게 드리필드와의 추억을 얘기해 줄 것을 부탁한다.


인물 소개에서 대략적으로 눈치챈 사람도 있겠지만, 이야기의 전개는 현재 시제와 과거 회상이 교차하면서 진행된다. 크게 앨로이 키어가 드리필드 전기의 도움을 얻으려는 현재 시제와 어셰든이 드리필드 부부와 함께 지냈던 과거 시점이 섞여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수명은 단 3초


서머싯 몸은 자신의 문학적 자선전인 <요약>에서 철학자들과 도덕론자들이 육체의 만족이 짧다는 이유로

육체를 줄곧 미심쩍게 바라보았음을 지적하며 쾌락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고 해서 쾌락이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쾌락의 가치가 경시되어 관념과 도덕에 치우지는 위험을 경계한 것이다.
- 서머싯 몸- <케이크와 맥주> 작품 해설


훌륭하다 서머싯 몸. 쾌락을 경시하는 풍조는 여전히 유효하다. 주말에 클럽 가는 사람과 독서 토론 나가는 사람 중 더 월등하고 유의미한 주말을 보낸 사람을 꼽으라면 대게 독서 토론 나가는 사람을 꼽지 않을까? <황야의 이리>에서도 육체적 쾌락을 상당히 경시하는 세태가 보였다. 육체적 쾌락과 정신적 수양이 대비되면서 상대적으로 육체적 쾌락이 하찮고 무의미한 것으로 비치는 경우가 많다. 주말 내내 집에 틀어박혀서 책을 읽거나 운동을 하지 않고 <셀링 선센>2를 보면서 도파민에 절어있는 나 자신이 그렇게나 한심하게 느껴질 수가 없으니 말이다.


최근에는 J팝에 미쳐있다. 강남이 커버한 J팝 노래들을 듣다가 자연스럽게 커버했던 노래 원곡까지 찾아 듣고 있는데 PMS도 아닌데 미치게 눈물이 난다. 노래 한 곡이 개심파 일본 애니 12편 정도 몰아본 거 같은 감동을 준다. 그러다 강남이 커버한 영상의 댓글을 봤는데 이런 댓글이 있었다. "지구의 나이를 사람의 나이로 환산하면 우리가 사는 인생의 평균 수명은 3초라고 해요. 우리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행복하게 살아봐요"


이런 늬앙스로 적힌 댓글을 봤는데 어쩐지 존나 오바스럽다고 느껴지면서도 상당히 울컥했다. 전 우주적으로 봤을 때 우리의 인생은 얼마나 한순간의 찰나에 불가한가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우습게 느껴지긴 한다. 동시에 전 우주적 관점이라는 무한한 관점이 도무지 와닿지 않아 당장의 이 찰나에 매달리게 되는 것도 있다.

인물 소개를 상당히 간략하게 생략해서 로지의 삶이 왜 그토록 케이크와 맥주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로지는 모공이 보이지 않는 하얀 피부에 파란 눈과 웃는 모습이 상당히 매력적인 여성이다. 술집 바텐더 출신으로 상당히 많은 남자와 추문을 갖고 있었다. 드리필드와 결혼 생활을 하면서도 켐프와 바람을 피우기도

했고, 이후 어셰든이 나이가 먹은 뒤에 재회했을 때에도 3명 이상의 남자와 추문이 돌았다. 좋게 요약하자면 '사랑을 사랑한'여자였다. 물론, 어셰든이 성인이 된 이후에 어셰든과도 사랑을 나눈다.

^_ㅠ 그 시대의 팜므파탈 돌아뱅이... 모든 이들이 로지를 모욕하고 흉을 볼 때에도 어셰든은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남자와 잠자리를 하는 것이 그녀에게는 상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그건 악덕도 아니고 음탕한 것도 아닙니다. 천성일 뿐이죠. 태양이 햇빛을 발산하고 꽃들이 향기를 내뿜듯 자연스럽게 자신을 내어 준 거예요. 그녀 자신에게 기쁜 일이었어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걸 좋아했으니까요.(...) 그녀는 늘 진실하고 예의 바르고 순박한 여자였어요."


라며 그녀를 응호 했다. 어쩌면 그가 그녀의 바람 상대 중 한 명이었기에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더 뜨겁게 항변한 것일 수도 있지만...(^_ㅠ) 이를 통해 서머싯 몸이 육체적 쾌락을 어떻게 대하는지도 볼 수 있다.


또한


"영원불멸한 지성이 보기에는 하찮은 행성에 잠시 머물다 가는 처지에 온갖 고통에 시달리며 아등바등하는 인간이 그저 농담거리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라는 말이나


"어차피 100년 후엔 우리 모두 죽을 텐데 왜 그리 심각하냐"


라는 말이 직접적으로 표현되는데, 이를 통해 서머싯 몸의 인생관을 엿볼 수 있었다.

'어차피 하찮은 한순간에 불과한데 인생 그냥 막장으로 즐기며 살아가면 뭐 어때?'라는 마인드는 자칫하면 허무주의로 빠지기 쉽다. 극 중에서 로즈의 인생관이 가장 드라마틱하게 드러나는 부분은 로즈의 아이가 죽고 난 날 바로 다른 남자와 불륜을 한 부분이다. 이 부분을 읽으며 알베르트 까뮈의 <이방인>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표면적으로 어떤 사람이 윤리적이지 못한 행동을 하면 그 행동으로 그 인간 자체를 정의하는 경향이 있다.

로지의 삶은 사실 요즘 사람들이 보기에도 뜨악스러운 면이 있다. 20대의 아쓰는 불륜(이라는 단어는 어감이 너무 강하지만)에 꽤나 관대한 편이었다. 폴리아모리인 남자랑 데이트도 해봤고, 애인이 있으면서 나를 만난 남자도 용서하고 친구로 잘 지냈다. 혹은 다른 여자가 생겼다며 나를 좋아하지 못한다는 남자에게 포부 넘

치게도 "그럼 둘 다 만나"라고 말하기도 했었다. 그만큼 내가 맺는 관계가 얄팍했던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있을 법한 병적인 시나리오는 웬만큼 다 겪어봤다. 이런 가치관이 변한 이유는 나의 경우가 아닌 주변에 있었다. 오래 만난 친구 둘이 한 친구의 바람으로 안 좋게 헤어지고 내 친구 관계도 위태로워지면서 이런 병적인 관계에 염증을 느꼈다. 이제는 그런 병적인 관계를 응원할 만큼 마음의 여유도 없고 나이가 들면서 중2 병도 어느 정도 치유됐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지나친 음주와 당은 건강에 해롭습니다


재밌는 사실은 커피와 담배나 케이크와 맥주 모두 중독성이 심하다는 것이다. 그만큼 적량을 찾아 적당히 섭취, 복용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얘기다. 한 입 손을 대는 순간 순식간에 홀케이크 하나 뚝딱 해치우는 건 일도 아니다. 그렇다고 마냥 허무주의에 빠져 개썅마이웨이로 인생을 살자는 건 아니다. (그러면 좋겠지만) 무엇이든 적당히가 중요하겠지. 적당히 육체적 쾌락도 존중하면서 정신 수양도 하고, 사회의 일원으로 일도 하면서 살아가는 자세가 필요하겠지. 낮이고 밤이고 평일이고 주말이고 가리지 않고 일만 하면서 수도승처럼 살 필요도 없고 매일 밤 강남 클럽에서 죽치고 있을 필요도 없다.

다만, 올바르고 바른 정도의 길에 굳이 육체적 쾌락이 빠질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 겉과 안이 건강한 그런 삶을 살아보자고요.




1 '젠트리'는 지주를 뜻했고 귀족들과 성직자들이 여기에 속했다. 그리고 대규모 부를 축적한 기업가, 금융가, 상인, 대학교수, 전문 직업인들이 차차 이 계층으로 편입되었다. 즉 어셰든네 가문은 젠트리 외의 사람들은 죄다 평민 나부랭이들

2 넷플릭스 부동산 중개인 예능. 미친 도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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