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쓰
읽었던 책을 다시 보는 건 이번이 두 번째다. 첫 번째는 25살 이별 후였는데, 희한하게 이번에도 (4개월이나 흘렀지만) 이별 후에 재독을 한다. 재독의 조건은 이별인 것일까? 그렇다면 이제 재독은 안 하고 싶은 걸… 아무튼 책 표지가 예뻐 우연히 빌렸던 책이 다시 생각났던 것은 어쩌면 이 책의 주인공인 김환기, 김향안 부부의 사랑이 부러워서일지도 모르겠다.
변동림에서 김향안으로
김향안의 원래 이름은 변동림이었다. 변동림은 신여성이었고, 김환기는 도전정신이 강한 사람이었다. 시인의 소개로 만난 김환기와 변동림은 상대의 지성에 매력을 느껴 결혼하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변동림 집안의 반대가 심했다. 변동림은 부모의 허락도 없이 ‘이상’과 결혼을 했었는데 이번에는 아이가 딸린 남자와 재혼을 한다고 하니 어느 부모가 허락을 쉽게 할 수 있을까? 나 같아도 뒷목 잡는다... 그 와중에 첫 번째 남편이 시인 이상인 것도 너무 신기하다…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사람들과 사는 기분은 어떤 기분일까? 물론 그 당시에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몰랐겠지만.. 하지만 변동림은 집안의 반대에 굴하지 않고 김환기를 선택했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의미로 성과 이름을 바꾸기로 했고, 남편의 성과 김환기의 아호*였던 ‘향안’을 받아 변동림은 ‘김향안’이 되었다. 그 후, 김환기는 ‘수화’라는 의미의 새로운 아호를 사용했다.
*아호 : 문인이나 예술가 따위의 호나 별호를 높여 이르는 말.
꿈을 꾸는 남자 & 꿈을 현실로 만들어 주는 여자
"자꾸 꿈을 꾸는 남자가 그 꿈을 현실이 되게 하는 아내를 만났다. 남자는 자꾸 큰 세상을 그렸고 아내는 그 큰 세상에 남편을 서게 했다. 함께 있음으로 해서 두 사람의 세상은 커지고 넓어졌다. 계속 꿈을 꿀 수 있었다."
수화는 자신의 예술이 세계 수준으로 어디쯤 위치해 있는지 궁금해했다. 향안은 심플하게 직접 나가보자고 했고, 신여성답게 먼저 파리로 떠났다. 돈을 절약하기 위해 향안은 홀로 1년간 남편의 전시를 준비했다. 그 덕에 수화는 미술사에 남는 화가가 될 것 같다는, 아니 그러고 말겠다는 더 큰 꿈을 꾸었다. 1956년, 수화는 40대 중반의 나이로 교수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버리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향안은 수화를 위해 틈틈이 불어 공부를 하며 수화의 귀와 입이 되어줬다. 수화가 그림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모든 환경을 그에게 맞춰 지냈고, 그림도 열심히 공부했다. 파리에서의 삶은 그리 녹록지 않았으나, 두 사람은 같은 것을 좋아하고 이해를 나누며 행복하게 지냈다. 좋은 동반자로서 두 사람은 부지런히 나아갔다.
믿어주는 사람이 옆에 있어 힘을 잃지 않았다
3년간의 파리 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 수화는 다시 교수의 삶을 살아갔다. 그러나 안정적인 삶보다 여히 도전을 꿈꾸었고, 머지않아 교수직을 버리고 뉴욕으로 향했다. 국제 미술전에서 한국 대표로 참가해 부문 명예상을 수상했지만, 대상의 작품을 보며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다. 겨우 안정된 생활이 다시 어려워질 것이 뻔했으나 향안은 수화의 결정을 언제나 지지했고 응원했다. 고여 있지 않고 세상을 향해 흘러가서 다행이라고 여기며…
향안은 뉴욕에서의 삶을 힘들어했다. 느리게 사는 것을 즐거워했으나, 뉴욕은 느리게 살 틈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화가 곁에 있어 버텼다. 나이는 숫자일 뿐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사람이 수화 아니었을까? 50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의 열정만은 여전히 청춘이었다. 그림이 팔리지 않아 경제적으로 힘들었으나 두 사람은 절망하지 않았다. 멈추지 않고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미래에 힘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수화는 가장 자기 다운 그림을 그렸고, 향안은 그의 선택이 옳다고 믿었다. 서로를 믿으며 힘을 잃지 않았다.
사람은 꿈을 가진 채 무덤에 들어간다
수화의 그림을 대하는 자세는 뜨거웠으나, 건강은 자꾸만 나빠져갔다. 몸은 매일같이 고통에 시달렸지만, 정신력으로 이겨내며 그림을 그렸다. 그러던 중 1973년, 두 사람이 사랑하던 화가 ‘피카소’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장 아끼던 사람이 세상을 떠난 듯 공허했다.
수화의 건강도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어려운 살림에도 향안은 열심히 수화를 돌보았으나 나아지지 않았다. 하루 종일 고개를 숙인 채 그림 작업을 하다 보니 목에 무리가 왔고, 병원에서는 목 디스크라고 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어깨 한번 펴!!) 병원에서는 수술을 권했고, 더 많은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수화는 수술을 택했다. 하지만 뇌출혈이 일어나 깨어나지 못했고.. 피카소가 세상을 떠나고 1년 뒤인 1974년, 수화도 세상을 떠났다.
처음 이 부분을 읽었을 땐, 한동안 책을 넘길 수가 없었다.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이 너무 허무하게 느껴져서… 재독 할 땐, 이 부분이 나올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한 장 한 장 책을 넘기기가 무서웠다. 그의 죽음이 가까워져 올수록 눈물이 앞을 가렸다. 결말을 알면서도 제발 그 수술을 받지 마!! 하며 과몰입을 했고, 결국 그의 죽음이 나왔을 땐 또 한 번 먹먹해졌다. 못다 펼친 수화의 꿈이 가여워서, 혼자 남겨질 향안이 안타까워서.
향안을 일으킨 수화
"사람 하나 사라졌을 뿐인데 우주가 텅 빈 것 같았다."
다정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도, 함께 산책할 사람도, 항상 그림 앞에 서 있던 사람도, 한순간에 사라졌다. 마음을 둘 곳이 사라진 향안은 사는 방법을 잊은 사람처럼 공허해졌다. 멍하니 시간만 허비하던 향안의 꿈에 수화가 나왔다. 꿈속에서 아주 잠깐 만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었지만, 결국 그녀를 일으킨 것은 수화였다. 슬픔이 가시지 않았지만, 향안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시작했다. 향안은 세상이 수화를 기억해 주길 바랐다. 그가 그린 그림의 가치를 알리고 싶어 '회고전'을 열고, '환기재단'을 설립했다. 경제적인 어려움도 그녀의 열정을 막을 수 없었다. 보다 좋은 전시를 하기 위해 다른 나라의 수많은 미술관을 견학했고, 직접 전시를 기획했다. 스스로 그림도 그렸고, 붓을 들 때마다 남편을 느꼈다. 수화를 사랑하며 향안의 예술에 대한 이해는 점점 깊어갔다. 수화는 세상에 없지만, 여전히 향안의 세상은 수화로 가득했다.
일기장 한켠에 적어둔 꿈이 현실로
4층짜리 집을 짓고 두 층은 가족이 쓰고 두 층은 사설 미술관을 하고 싶다.
일기장 한켠에 적어둔 수화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향안은 살아냈다. (살고 싶어 산 것이 아닌 수화의 꿈을 이뤄내기 위해 살았으니 버티는 의미의 '살아냈다'가 맞을 것 같다.) 수많은 고비가 있었지만 1992년, 향안은 마침내 '환기미술관'을 열었다. 김환기 20주년 전시도, 결혼 50주년이 되는 금혼 기념전도 환기미술관에서 열었다. '아름답게 살자'던 두 사람의 약속은 미술관에서 여전히 계속되었다. 그렇게 수화를 알리기 위해 30년간 열심히 달렸던 향안은 2004년, 마침내 수화를 만났다.
소울메이트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땐, 두 사람의 사랑이 너무나 아름답고 멋있었다. 진정한 소울메이트란 이 두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나도 언젠간 수화와 향안 같은 사랑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나의 소울메이트는 대체 어디 있는 걸까, 태어나긴 했을까, 하며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쳤었다.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는 향안이 참 대단하다고 느꼈다. 내가 향안의 입장이라면, 안정적인 삶보다 계속 도전하는 삶을 지향하는 남편을 계속 응원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절대 아니라고 본다. 한때 나는 내가 도전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프리랜서 생활을 하며 뼈저리게 느꼈다. 나는 한 곳에 묶여있는 삶을, 월급 따박따박 나오는 안정적인 삶을 지향하는 사람이라고. 수화의 옆에 그를 믿어주고,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주는 향안이 있었기에 수화는 그림에만 몰두하고, 세계적인 화가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안정적인 삶을 지향하는 나 같은 사람을 만났다면 수화는 세계적인 화가는 무슨, 그저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됐을 수도, 텅 빈 영혼을 가진 교수로서의 삶을 살아갔을 수도 있다.
게다가 수화의 그림을 알리기 위해 향안이 노력했으니 사실상 수화를 세계적인 화가로 만든 것 역시 향안이 아닐까? 이래서 마케팅이 중요… 새벽에 쓰고 있어서 아무 말 대잔치다. 아무튼 수화와 향안처럼 같은 것을 좋아하며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고, 그 사람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공부하고 함께 성장하고… 이런 사랑…해보고 싶다..! 어디 있니, 내 운명!! 제발 나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