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턴에게 여름휴가라는 것은 뭐랄까, 100만원을 얹어 주면서 '너 휴가 갈래 이거 받을래?'라고 하면 미련 없이 여름휴가를 택하게 되는 그런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동기들은 의사 국가고시에 합격한 뒤 약속이라도 한 듯이 마일리지 적립이 되는 비싼 연회비의 카드에 가입하고, 마이너스 통장을 뚫었으며, 첫 월급은 호기롭게 가족들에게 한 턱 내는 것으로 탕진했다. (가족들 선물을 사고 나면 본인을 위한 사치를 할 수 있는 돈은 남아 있지 않았다, 애석하게도.)
나는 그 해 여름휴가를 남자친구와 맞춰 쓰기로 약속을 했는데, 사실 굉장히 위험한 발상이었다. 내가 인턴 일을 할 때만 해도, 인턴은 병원 내 최하위 계급이었다. 극단적인 상황을 예로 들어보겠다.
순환기내과에서 아침 브리핑을 시작한다. 인턴이 새벽 5시에 일어나 재원 환자 리스트를 살피고 현황표를 체크한다. 현황표를 양면으로 프린트한다. 병동 내 간호사 스테이션에서 사용하는 프린터기들은 대부분 양면 인쇄가 안되기 때문에, 예상하는 그 귀찮은 작업을 반복한다. 현황표는 30개 정도 뽑아두어야 하는데, A4 용지를 많이 쓰면 병동 간호사들이 눈치를 준다. 그럼 슬그머니 피해서 옆 병동에서 인쇄를 마무리한다. 순환기내과 의국으로 달려가서 현황표를 세팅해두고, TV를 켜서 컴퓨터와 연결하고, 마우스와 키보드가 잘 움직이는 지도 확인한다. 그러면 아침 6시쯤 된다. 인턴은 헐레벌떡 병동에 가서 아침에 오더가 난 EKG(심전도), abga(동맥혈 채혈), CT 동의서 등등을 해결한다. 그리고는 부리나케 중환자실로 뛰어내려 가서-엘리베이터는 너무 느리다- EKG 머신이 돼서 기계적으로 리드를 연결하고, 가슴에 붙이는 뽁뽁이들을 떼었다 붙였다 한다. 그러고 나면 7시 반 정도가 된다. 인턴은 다시 전속력으로 뛰어서 의국으로 간다. 브리핑 때 먹고 마실 음료와 샌드위치가 배달이 되면, 의국으로 들어오면서 집어 가기 편한 장소에 가지런히 놓아둔다. 혹시라도 아침에 응급실 통해서 입원한 환자가 없는지 확인하고, 혹시 있다면 현황표 뽑는 일을 다시 해야 한다. 30분 내로 마무리해야 하기 때문에 매우 긴장되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8시가 되면 차츰 폴리클(학생 실습생들)과 전공의들, 펠로우, 교수님들까지 착석한다. 인턴은 졸리지만 혹시라도 마이크가 필요하거나 빔 프로젝터를 사용하게 되거나 기타 여하 복잡하고 잡스러운 일이 생기면 해결해야 되기 때문에 잘 수 없다. 눈을 뜬 상태로 1시간을 졸고 나면 브리핑이 끝나 있다. 인턴은 혹시나 남은 샌드위치가 없나 기웃거리지만 얄밉게도 전공의 선생님들이 이미 여분을 챙겨 나가고 있다. 폴리클들은 아까 몰래 2개씩 먹는 것을 보았다. 인턴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편의점으로 가서 삼각김밥을 사 먹는다.
인턴은 말하자면 병원의 쓰레받기 같은 존재다. 분명히 필요하긴 한데 하찮고, 신경 쓰기 전까지는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런 위치에서, 휴가 날짜를 맞출 시도를 한다는 것은 무모한 발상이 아니었을 수 없다.
결과적으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지만. 남자친구와 헤어졌기 때문이다.
바르셀로네타 누드 비치
나는 무작정 바르셀로나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다. 바르셀로나에 가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크게 복잡하지 않았다.
1. 학생 때 유럽 배낭여행을 갔을 때 재미났다
2. 엄청나게 덥고 뜨거운 곳에 가서 복잡한 생각들을 날려 버리고 싶다
3. Vicky Christina Barcelona (이 영화의 한국어 제목은 도무지 인정하기가 싫다)의 하비에르 바르뎀 같은 남자를 만나고 싶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바르셀로네타 해변의 열기는 두 시간 이상 견디기 힘들었다. 더위를 가시기 위해 맥주를 들이켰지만 술을 못 하는 내 얼굴과 몸은 오히려 벌게졌고, 잔뜩 태닝 한 여자의 모습이 되었다.
흰색 수영복을 입고 있던 나는 애써 담담하게 엎드려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나체를 훔쳐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너무나도 무료하고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술에 취한 탓이었다. 갑자기 미친 듯이 외로웠다. 나는 충동적으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수영복 차림 위에 얇은 흰색 민소매 원피스만 걸친 채로 해변에서 빠져나왔다.
근처 역에서 옷을 갈아입을 생각이었지만 길을 잘 못 들어 나는 그 차림으로 장장 30분을 걸었다. 날은 더웠고, 수영복도 원피스도 바싹 말라 나의 의도치 않은 시스루룩은 사라졌다. 아직까지도 벌건 얼굴만이 내가 불과 몇 시간 전에는 반나체로 해변에 있었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500일의 썸머
콜드플레이 노래를 들으면서 여명이 밝아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어젯밤의 상그리아 덕분에 얼굴이 부어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아주 많이 어렸을 적에 마누엘 푸익의 <거미 여인의 키스>를 읽었다. 고등학생 때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집에 있었던 민음사 전집의 일부였다. 나는 그 당시 '난 너네랑 다르고 나는 너무 특별해'라는 중2병 terminal stage(말기)에 있었기 때문에 엄청난 재미를 느끼지 못했음에도 끝까지 책을 읽어냈다. <거미 여인의 키스>를 읽으면서 가장 크게 느낀 점은 이것이었다.
'뭐냐 이 술 취해서 쓴 것 같은 책은.'
숙취에 시달리는 바르셀로나의 아침에, 나는 그 책을 가져오지 않은 것이 진심으로 아쉽게 느껴졌다. 그 책은 나도 취해서 읽어야 하는 글이었던 것 같다.
어제 저녁, 나는 람블라스 거리를 걷다가 종업원이 제일 덜 인종차별적인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식당가를 찾아 들어갔다. 빠에야와 상그리아가 모두 2인 이상을 기준으로 주문할 수 있었지만, 나는 혼자였기에 별 수 없이 그대로 주문했다. 그리고는 모나미펜 하나에 구겨진 에이포용지들을 꺼내서 빠에야 옆에 조심히 두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정말이지 열렬하게 무언가라도 기록하고 싶었다. 마치 이별 여행처럼 되어 버린 나의 소중한 첫여름 휴가를, 단 한순간도 빠트리지 않고 샅샅이 기억해내고 싶었다. 지난 몇 달 간 인턴 숙소의 이층 침대 위에 누워서 숨 죽인 채 삼켜냈던 것들을 다 토해내고 싶었다.
내가 미친 듯이 악필로 휘갈기며 글을 써내려 가자, 옆에 앉아있던 흑인 남자가 무엇을 쓰냐며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 나는 영어에는 도통 자신이 없었으나, 술기운을 빌려 유창한 척하며 일종의 일기(kind of diary)를 쓰고 있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가 자신은 노르웨이에서 왔다고 말하며, 내게 어느 나라에서 온 것인지 물었다. 나는 대답하기 이전에, 내가 생각하는 노르웨이의 바이킹족과는 다른 그의 외형에 사뭇 놀랐다. 나는 이내 아무리 속마음이지만 정말 저질스러운 편견이다,라고 마음을 고쳐먹으며 남한에서 왔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반색을 하더니, 자신이 배두나를 정말 좋아하며, 클라우드 아틀라스로 팬이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배두나와는 아무런 인연이 없었지만, 어쩐지 고마운 마음이 들어 건배 제의를 했다. 이어서 나도 왠지 그의 기분을 좋게 해주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는데, 아무리 내 머릿속을 뒤져 보아도 중학교 때 사회 시간에 배운 스칸디나비아 3국 외에는 노르웨이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나는 카모메 식당이라는 영화를 아냐고 묻고 싶었지만 생각해보니 핀란드였던 것 같아서 관두었다. 연어에 대한 질문이 머리에서 맴돌았지만 입 밖으로는 꺼내지 않았다.
그는 백인 아내와 유모차에 숨어 도통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어린 아기와 함께 여행 중이었는데, 내가 혼자 여행을 온 것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나는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충동적으로 혼자 바르셀로나에 왔다고 했다. 그가 얼마 정도 지속된 사이었냐고 물어서 500일 정도라고 대답했더니, 그는 매우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노르웨이에서 그런 식으로 일수를 세는 것은 신생아밖에 없다고 한다. 나는 한국의 10대(teenager) 문화와 비슷한 것인데, 한국에서는 100일 단위로 기념일도 챙긴다고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가 계속해서 놀랍다는 제스처를 취해서, 나는 그다지 더 설명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문득 <500일의 썸머>는 외국에서는 정말 센세이셔널한 작명이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나의 글쓰기를 중단한 걸 사과하며 즐거운 여행이 되길 바란다는 인사를 하였고, 우리는 각자의 테이블로 돌아갔다. 나는 거대한 상그리아를 빨대로 쪽쪽 빨면서 2인분짜리 빠에야를 해치워 나갔다.
눈이 충혈될 정도의 더위가 바닥에 먼지처럼 내려앉자 그 위로 람블라스 거리의 가로등 불빛이 쏟아졌다. 하늘은 까맣다기보다는 파랬다. 이상하게도 별도 달도 보이지 않았다. 취해서 오히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괜찮을까?
나는 갑작스럽게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무서워졌다. 그래 봤자 나는 위생복을 입고 스킨 테이프를 주기적으로 갈면서, 매번 없어지는 가위들에 분노하고, 새벽에 걸려오는 전화 벨소리에 반사적으로 답을 할 것이다.
한 때 내게 가장 가까웠던 사람은 나를 이리도 슬프게 하는데, 나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 인해 행복해질 수 있다니. 나는 여행을 통해 아주 조그마한 탈출의 문을 만들었다. 자주 빠져나가면 티가 나지만 쉽게 돌아올 수 있는. 나는 아마도 아주 행복해질 것 같다, 주문을 외웠다.
취해서, 잔뜩 취해서 카탈루냐 광장을 걸었다. 동양인은 나뿐이었다. 우주 속에 동 떨어진 기분을 느끼면서, 거리가 지나치게 아름다워 빙글빙글 도는 것은 내가 많이 취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짧은 치마를 입고 양 볼이 시뻘게진 채로 바르셀로나 한복판을 걷는 나를 우리 아빠가 보았다면 화를 내다 못해 통곡을 할 일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