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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예 Apr 20. 2020

6. 제임스 본드 혹은 한니발 렉터 식으로 관찰하기-1

하얗고 미끌미끌한 남자


그는 날 때부터 하얬다. 결점 하나 없는 그의 흰 피부는 그의 불같은 성미나 이미 유명한 여성편력, 그리고 거대한 체구와는 다소 대조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그 매끄러운 석고상 같은 흰 피부야말로 그가 지나온 삶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특징이기도 했다.


어렸을 때부터 과잉보호 속에서 자라온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그는 부모에 대한 묘한 애증을 갖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주 부유하고 명망 있는 가문의 사람이었으나 좋지 않은 학력이 항상 마음에 걸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아버지의 아버지, 즉 그의 할아버지의 마음에 걸렸다는 표현이 더욱 맞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는 매력적이지는 않지만 아주 똑똑한 여성과 결혼했다.


그런가 하면 그의 어머니는 어릴 적부터 총명하기로 이름 난 소녀였지만 그 누구도 그 총명함을 귀하게 여겨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는 밤에는 미싱을 돌리며, 낮에는 원심분리기를 돌리며 그렇게 대학을 졸업했다. 그의 어머니는 대학문을 벗어나자마자 도망치듯 그의 아버지와 결혼했다. 아직 초등학교도 채 입학하지 못한 막내 동생과, 방구석 깊이, 침대 아래에, 여기저기 소주병이 널브러져 있던 반지하 셋방을 뒤로한 채.


그는 어린 시절부터 귀여운 외모를 가진 아이여서, 어딜 가든 환영을 받았다. 게다가 그는 똑똑하기까지 해서,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쯤엔 이미 수재 소리를 듣고 있었다. 에게는 딱 한 가지,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그의 누나였다. 그의 누나는 자신보다 외모가 뛰어나지도 않고, 머리가 좋지도 않았으나 어딘가 모르게 당당한 구석이 있었다. 심지어 그의 부모가 눈에 보이게 그와 그의 누나를 차별하며 그에게 더 많은 새 옷을 사주고 더 좋은 학원에 보내주어도, 그의 누나는 그런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초연해 보이는 눈으로 무심하게 그를 보고 지나치고는 했다.


그가 태어나기 전 마치 연습 삼아 태어난 아이 취급을 받던 그의 누나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는데 의대에 입학하게 되었다. 반면 그는 의대생이 되기 위해 지난한 재수 생활을 겪어내야 했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이나. 아이러니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한 사실은, 이미 그의 누나가 의대에 입학해버렸기 때문에 그가 의대에 입학한 것은 이제 더는 대단한 일이 되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에게 있어 여자는 어머니처럼 아주 다루기 쉽고 우스운 존재이면서, 동시에 누나처럼 아무리 애를 써도 넘기 힘든 벽처럼 느껴졌다. 결국에 이런 성질은 그의 복잡한 여자관계로 나타났다. 그에게 여자를 만나는 일이란 신나고 쉬운 게임이었지만, 동시에 그가 원하는 여자들은 항상 가질 수 없거나, 가져서는 안 되는 여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엄마 같은 여자들로부터 사랑받았으나, 누나 같은 여자들을 원했다. 


그의 피부는 항상 물기를 머금고 있었고,  아무리 피곤하고 바쁜 전공의 생활 와중에도 그의 얼굴은 방금 세수를 한 듯 말간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아주 더러워서, 그 시선을 받는 것만으로도 끈적이는 액체 속으로 깊이 빠지는 듯한 상상을 하게 했다. 그의 눈은 술을 아주 많이 마시면 금세 울듯이 촉촉해졌고 그 표면으로 외로움이 꾸물거리며 부상했다. 그리고 이내 뜨거워진 뒤에, 텅 비었다.


그 눈을 보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안달이 났다. 그는 아주 가벼운 순간순간들의 연속으로 이뤄진 사람으로 보였고, 그게 그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게 했으며, 그런 점이 그와 그의 연인을 외롭게 하는 동시에, 아주 매력적으로 만들었다.


연극하는 여자


그녀가 열다섯 살이 되었을 무렵에 이미 그녀는 자신이 평생을 외로움에 몸서리치리란 사실을 알았다. 그 믿음은 거스를 수 없는 카르마처럼 무겁고도 절대적으로 그녀를 지배했기 때문에, 그녀는 실제로 외로웠다.


그녀의 선이 굵은 얼굴, 커다랗지만 눈동자가 작은 눈, 꼬리가 쳐진 입매는 평상시에는 항상 굳은 표정이어서 쉽게 오해를 샀다. 그 점 때문에도 그녀는 항상 외로웠다. 분명 흔히 생각하는 인자한 의사가 되기에는 역부족인 외모였다.


그녀가 스무 살이 되어 대학생이 되고 난 뒤 자신의 생김새나 분위기가 사람들과 친해지는 데에 아주 어려움을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꽤나 머리가 좋은 편이었기 때문에, 금세 어떻게 하면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얻을 수 있는지 깨달았다. 그녀는 일부러 더 크게, 자주 웃었고, 선배들의 재미없는 농담에 박수를 쳤고, 체질에 맞지 않는 술들을 주는 대로 받아 마셨다.


해가 지나면서 그녀의 표정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다채로워졌지만 연극적으로 느껴질 때가 많았다. 그녀는 페르소나 Persona라는 말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지만, 스스로 항상 가면을 쓰고 있다 여겼다.


그녀의 현학적인 말투나 묘하게 매사에 공격적인 태도, 그리고 그것을 감추려는 억지 눈웃음이랄지 일부러 생동감 넘치게 행동하는 모습들은 그녀 자신을 지치게 만들었다. 그녀는 공허함에 부르르 떨면서 아주 시끄러운 장소만 찾았다. 심장이 울릴 만큼 큰 음악 소리와 아주 조금만 입을 축여도 취하는 술들, 그리고 그녀의 순간순간의 외로움을 달래줄만한 사람들이 있는 곳.


그리고 그런 곳에 갔다 오면 그녀는 방구석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곳에서 글을 썼고,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었다. 음악은 아주 우울한 것만 찾아 들었다.


그녀는 사실상 연애 불능 상태였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고질적인 인간에 대한 불신이나 편집증은 그 근원을 알 수 없었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녀는 사랑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었지만, 동시에 사랑하는 것을 괴로워했다. 그래서 그녀는 맹목적으로 사랑의 대상을 찾았지만 금세 질려 버리거나 낙담하고야 말았다.


그녀가 마음을 주려는 남자들은 심연과도 같은 남자들이라, 서로가 서로의 깊은 곳으로 끌어들여, 외로움은 배가 되었다. 반면에 그녀를 알고 싶어 하는 남자들은 그녀의 깊은 곳을 이해할 준비가 되지 않은 자들이었다.


수선화를 닮은 남자


그의 속눈썹은 아주 길었다. 얇게 쌍꺼풀진 눈과 가지런하게 수 놓인 듯한 눈썹, 그리고 남자치고는 붉은 입술이 한 데 어울려서 그를 예쁘장하게 보이게 했다.


그는 흡사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미동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크지 않은 그의 키와 흰 피부가 더욱 이러한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그런 이미지에 걸맞게 그는 매사에 장난스러워서, 아주 귀여운 아이라도 오랜 시간 동안 말썽을 피우면 성가시게 느껴지는 것처럼, 결국에는 주변 사람을 약간 짜증 나게 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다가도 이따금 진중한 얼굴과 목소리로 일에 몰두할 때면, 이십 대 후반의 장성한 어른 남자로 보이는 것이었다.


그는 항상 말끔한 머리에 좋은 향기가 나는 셔츠를 입었고, 같은 색의 바지들을 여러 개 가지고 있었다. 의사라는 직업 때문도 있겠지만, 그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자주 손을 씻었다. 저렇게 결벽이 심해서야, 연인을 만지는 것은 가능할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그가 처음으로 그녀의 볼에 손을 가져다 댔을 때, 그녀는 그가 실수했다 싶어 손을 다시 움츠릴까 겁이 났다. 그녀가 보기에, 그는 마치 나르키소스와 같아서, 자신 말고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그의 눈동자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와 닮아 있었다.


"나는 너한테는 모두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아주 어두운 것들도."


그녀는 핸들을 잡은 그의 얄쌍하고 흰 손가락에 잠시 시선을 주었다가, 그의 옆모습을 한 동안 바라보았다. 끝이 둥근 눈매 위로 그의 짙고 긴 속눈썹이 그림자를 만들어 어지러이 흩어져 보였다. 그는 말을 마치고 붉고 도톰한 입술을 잠시 오므렸다가 살짝 혀로 축이고는 이내 입을 닫았다.


그녀는 그가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고마워요, 라며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슬퍼서 거의 질식할 지경이었다. 왠지 오늘이 그를 볼 수 있는 마지막 날일 것 같아서. 차 안에서는 다이나믹 듀오의 노래들이 연달아 나오고 있었는데, 그는 그녀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볼륨을 줄였다. 그 하찮은 배려가 그녀를 슬프게 했다.


우리는 끝까지 정작 중요한 이야기는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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